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행장

안효공 배위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소(향토유적 제30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묘 표 석


夫人順興安氏領議政靑川府院君諱溫之配封三韓國大夫人考領敦寧昭懿公諱天保祖順興君諱千善曾祖贊成事文懿公諱文凱安孝公以世宗國舅擢首相奉命出彊而姜尙仁獄起慘被權臣乘時讒媾火色遂炎卒以掇禍嗚呼痛哉其時禁府提擧柳廷顯固請收拏夫人久在賤案世宗末年議政李稷等啓曰恭妃殿下母儀一國之母安氏載賤案 至爲未安請削賤案還給職牒世宗召知申事郭存中面諭曰予嘗侍坐太宗太妃兩殿太妃曰恭妃母在賤案事甚 不可太宗曰予當改之未及施行遽爾賓天予知父王意如此而特未施行故不及開說近日諸多以爲言今大臣之言又如此其削賤案還給職牒竝免其子女且母子不相見于今屢年某日恭妃當往安氏第卿等知之至文宗嗣位首 詢諸大臣特伸公寃復爵贈諡次第哀榮噫世遠文泯夫人生卒年甲與夫閨闈懿行俱無所傳而福建綿遠子孫繁昌昭憲仁順兩聖后曁王世子嬪繼膺沙麓之祥恭肅公澮忠惠公連源通源文貞公喜壽忠靖公悅皆秉台鼎此外名公碩輔爲國柱石接武前後不可殫記非公若夫人積德種善何能致此墓在安城郡東嘉美屯壬坐之原
九世孫 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檀 撰

5세조 안효공 배위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행장
대부인은 순흥안씨로서 영의정 청천부원군 시호(諡號) 안효공(安孝公) 휘 온(溫)의 배위이시며 삼한국대부인으로 봉작(封爵)되시었다.
친정 아버지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시호 소의공(昭懿公) 휘 천보(天保)이시고, 할아버지는 순흥군 휘 천선(千善)이시며, 증조부는 찬성사 시호 문의공(文懿公) 휘 문개(文凱)이시다. 安孝公께서는 世宗大王의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으로 재직중 太宗께서 世宗께 양위하신데 대한 明나라 황제의 윤허하심에 대한 사은사로 출국중 강상인(姜尙仁)의 옥사가 일어나자. 참화(慘禍)가 권신의 모함에 의한 참소로 드디어 公에게까지 미치어서 자진(自盡)하셨다. 오호라 통재여 그때에 금부당상 유정현(柳廷顯)의 주청에 의하여 죄인의 配位라 하여 대부인에게는 직첩(職牒)이 삭탈되고, 노비로 영구히 종사하는 천안이 결정되었다. 世宗八年 5월 27일 영의정 이직(李稷) 우의정 황희(黃喜)등이 소헌왕후의 모부인이신 安氏는 一國의 국모의 사친이신데, 천비로 그냥 두심은 심히 미안한 일이니 천안에서 삭제하여 그 전의 직첩을 환급(還給)하실 것을 상계고함에 이르렀다. 세종께서는 승정원 도승지인 곽존중(郭存中)을 부르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전에 태종과 대비 양 전하를 모시고 앉아 있을 때에 대비께서 말씀하시기를 소헌왕후의 사친이신 대부인 안씨를 천비로 그냥 두심은 심히 미안한 일이며, 불가한 일이라고 말씀하시자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땅히 면천조치를 시행하여야 할 일인데 미처 시행치 못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였는바 얼마 아니하여 병환으로 승하하시었다. 나는 부왕의 뜻이 그러하심에도 특명에 의하여 면천 명을 내리시지 않았음을 불감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인데 요사이 대신들 간에 말들이 많이 있어서 상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대신에 뜻에 따르겠노라 대부인의 천비를 면케하며 삼한국대부인의 직첩을 돌려 드림과 동시에 그 자녀에게도 아울러 면천과 환급직첩의 특사를 내리노라 또한 그간 모자지간에 만나보지 못함이 몇 년 이었던가 소헌왕후도 마땅히 안씨께서 거처하시는 댁을 왕래하면서 뵈옵게 하여야 하겠으니 경(卿)등은 알아서 조처하라」는 명령이 계셨다. 그로 인해 그 해 六월 四일에는 소헌왕후께서 공식거동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상왕십리 방의 대부인사저에 납시어 관급으로 잔치를 크게 벌이고 모녀 상봉례를 베푸신 후부터는 대부인께서 수시로 궁궐에 출입하시었다. 그 후 세종께서 승하 하시고 문종께서 등극하심에 이르러서야 대신과 상의하시고 특명으로 안효공의 신원(伸寃)과 관직의 복작과 더불어 시호(諡號)를 호화부쟁왈안(好和不爭曰安)이요, 오종안지왈효(五宗安之曰孝)라고 증시 하시어서 슬프면서도 가문의 영화를 맞았도다. 슬프다 당시의 가화와 세월이 오래 되어 문적이 모두 없어져서 대부인의 생년과 갑년 및 소녀시절부터 성년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큰 덕행을 더불어 모두 전하지 못하다.
世宗26年 11월 17일에 대부인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으신 소헌왕후께서는 급히 거동하시와 문병하시며 전의로 하여금 치유케 하는 한편 승려로 하여금 불공케 하였으나 24일에 별세하시니 왕후께서는 친히 왕세자와 더불어 거동하시와 치제하시었으며, 조정에서는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로써 예장도감을 삼아 國葬에 준하여 장례 되었으며 묘하에는 사묘(祀廟)가 설치되고 제전이 하사되었으며 노비 20名이 사묘에 배속되어 산소수호와 향사를 받들게 하다.
그 후 福과 慶事는 먼 子孫에게 미쳐서 繁昌하여 昭憲·仁順의 두 聖母가 계시고 또한 王世子嬪(後에 端懿王后가 됨)에게 이어지고 그 빛과 서기는 恭肅公 휘 회(澮), 정이공 휘 결(決), 충혜공 휘 연원(連源), 좌의정 휘 통원(通源), 문정공 휘 희수(喜壽), 충정공 휘 열(悅), 모두 정승의 반열에 끼었고 그 외에 名公이나 석보(碩輔)와 국가를 위한 주석지신이 전후로 이어서 많이 있으므로 모두 쓰지 못하나, 이것이 모두 공과 대부인의 적덕과 적선하심에서 이르름인가 하노라. 묘소는 안성 가미둔. 현 안성군 금광면 오흥리 인좌원에 계시다.
1713년 임진추
9세손 보국숭록대부판중추부사 단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