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공(휘 의구)

판사공 휘 의구 단비
소재지:전남 보성군 복내면 장천리


죽산재 판사공 재실 전경
소재지: 전남 보성군 복내면 장천리


소재지:전남 보성군 복내면 장천리

새 장 비


義禁府判事諱義龜墓碣銘
논어(論語)에 『증자(曾子)가 가라사되 신종추원(愼終追遠)하면 백성들이 본받는다』하였으며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 『신종(愼終)이란 초상때 예법을 다함이고 추원(追遠)이란 제사때 정성을 다함이라』하였으니 그러하다면 자손이 조상님을 위해 정성을 다함은 그 의의가 중하지 않으리오. 우리나라가 일찍이 예의밝은 나라로 천하에 알려져서 四代祖까지는 사당제사를 지내고 五代祖이상은 1年에 한 번씩 묘제를 올려서 조상님을 추모하는 정성을 다해왔는데 혹 난리를 겪어 묘소를 찾지 못하게 되면 때로는 단(壇)을 쌓아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부득이한 일로서 의리에 해되지 않을 것이다.
숭록대부 의금부판사 청송심공의 휘는 의구(義龜)인바 고려말 조선조 초기의 인물이다. 운곡 원천석(元天錫)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학문과 덕행이 훌륭하며 조정에 출사(出仕)함에 기강을 세우고 명분을 바로잡아 일찍이 청백으로 이름이 났다. 만년에는 퇴직한 후 지평현(지금의 양평군)에 거주하면서 적악산의 산수를 좋아하고 거문고와 서예를 즐기면서 일생을 마쳤으니 지금으로부터 600年이 되었다.
묘소는 배위인 정경부인 상주김씨와 함께 마전(麻田:漣川) 선산에 있다고 족보에 실려 있으나 중도에 산소를 실전하여 백방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찾지를 못하였다. 그 후 병인(丙寅:1986)년 가을에 종중이 모여 천주동에 설단하기로 결의하고 단소를 세우면서 못난 본인에게 비문을 청하기로 사양을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청송심씨는 고려조에 문림랑 위위시승(諱 洪孚)을 시조로 하여 역대로 문벌이 높아 해동의 대가가 되었다. 조선조 초기에 청성백 정안공(諱 德符)은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니 公은 이분의 둘째 아들이다. 자세한 행적은 지금 추측할 수 없으며 큰 사적만 알 수 있는바 나머지 부분은 부언할 필요가 있으리오.
아들 면암정공(諱 溝)은 벼슬이 좌랑(佐郞)으로 네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강직하기 때문에 숙부 안효공(諱 溫)의 피화사(被禍事)를 항의 직언했다가 간신들의 미움받아 보성에 귀양가서 세상을 떠났다. 자손들이 여기에 살으니 토박이가 된 것이다. 아! 옛 사람들이 묘가 보이는 곳에 설단하고 제사를 지냈다 하더니 이제 심씨(沈氏)도 그리하고 또한 원용하여 예가되니 민덕을 두터히 하는데 일조가 된다 하겠다.

대한 광복후 42年(1986年) 丙寅 10月 日
星州 李栢淳은 글을 짓고 글씨씀


承旨公世庄碑文
國家文敎之宣未始不自王都漸及于遐方而徃徃見法家禮俗在窮澨絶峽去京師千里之地而風範彬彬雖比畿甸簪纓之族未或多遜如此者何也盖國家變亂無世無之而爲名公賢輔者或愚王室難言之變有爲羣小所擠而投竄絶徼遂沒於其地者焉有道與時違不肯疊跡於狐烏奔競之間而飄然遐擧胥宇於芬華無聞時擾不到處以爲安身立命之地遂終其身而不悔者焉於是爲子孫者着爲土人世其風範敬守無替是其所由焉耳嗚呼若吾寶城之獐川居沈氏亦其一也沈氏上世靑松人高麗文林郞諱洪孚首見於譜繼有名官諱龍靑華府院君諱德符李朝左議政靑城伯諡定安諱義龜義禁府判事子曰溝字渭叟號面巖亭寔爲玆鄕聿胥之祖也今其子孫己出十餘世爲數百戶而布濩各地在在敦詩書尙禮敎爲一坊名族是未必不面巖公遺澤之不斬而傳之于今也謹按公倜儻多氣槪成童前己用心於爲己之學世宗晟際早被經學之選歷官至三曹佐郞又累出爲宰所至有政聲見時政有失輒抗章論列請其改革上嘉歎以爲廊廟器至戊辰叔父安孝公遘誣獄公直言爭之忤當路流南陲居五年而遷寶城俄蒙赦宥而旋聞端宗遜外遂絶意榮達隱於是村以獻靖自訖世祖物色徵之使者三至而終不起從弟恭肅公勸造朝亦不應曰騰翥素餐孰若沈滯而自安乎乃就巖畔因樹爲亭而居之以詩見志不問世外有何人作何事臨沒戒子孫曰銘旌只當書以林泉居士愼勿用官啣也脩然而逝時成宗二十四年癸丑也訃聞上悼惜不己遣官致賵命國地師卜吉安厝特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叅贊官嗚呼有祖如此使在蠻夷之域將十世有遺風况吾寶城雖去京師遠文風蔚然爲南服右鄕則宜乎公後承之不墜箕裘而綿連傳於久遠也故公之子長曰由訥官僉正次曰由剛官叅奉贈吏議皆著文行而僉正之後有諱嗣濂官啓功郞奉常寺直長諱恒壽號誠齋丙子倡義諱南維號斗南官至勵節校尉訓鍊院判官有循吏之稱如近世又有慕巖諱能杓以文德著士友皆推重吏議之後諱尙顔贈司僕寺正諱能五生員贈同知中樞賢人之遺風其遠矣哉今慕巖公之冢孫京澤氏收宗議於宗中就余徵以文其意豈亶以兮耀鄕坊爲哉欲使後仍者顧諟惕念期繼承於永世焉耳余旣無以辭謹據狀書此以塞責云

大韓光復後三十八年癸亥孟春 日
星州 李栢淳 撰
後孫 京 澤 謹書


승지공세장비문(번역문)
국가의 문교행정이 선포되지 않고 왕도로부터 점차적으로 하시골까지 미치지 않고 있다함은 법가의 예속을 깊은 산골이나 바다 갯벌 마을에서도 볼 수 있으니 서울가기가 천리나 되는 지역에서도 풍속과 법식이 잘 갖추어지고 서울 문안에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견주어 볼 적에 많은 손색이 없으니 이와 같음은 누구의 때문일까.
대개 국가의 변란이 역대마다 없지 않았으되 유명한 재상이나 현명한 보좌관들도 왕실에 말하기 어려운 변란을 만났을 적에 많은 소인배들의 배척을 당하고 아주 먼 변방에 귀양되어 거기에서 죽어가는 자가 있고 세상의 도덕성이 위배되는 때는(孤烏奔競) 여우와 까마귀가 분주하게 다투는 사이에 행적 남기기를 즐겨하지 않아 훌쩍 멀리 떠나서 어려운 세상 일이 들리지 않는 곳을 화려하게 꾸미고 살면 몸을 편히하며 천명을 따를 수 있는 지역으로 여기고 그 일신을 마쳐도 후회하지 아니한 자가 있었다. 이에 그 자손된 자들이 토착민의 본토박이가 되어 대대로 그 유풍과 본보기가 된 규범을 지키어 시듦이 없으니 이는 그에 연유한바라 슬프도다! 보성 장천에 사는 심씨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심씨의 윗대는 청송인이니 고려 문림랑 휘에 홍부시니 족보의 처음에 나타나 있고 이어서 유명한 벼슬들이 있으니 휘는 용으로 청화부원군과 휘에 덕부는 이조 좌의정(정1품)으로 청성백이시며 시호는 정안이시다. 휘에 의구는 의금부판사(종1품)이시고, 아드님으로는 구이니 자는 위수요 호는 면암정이시니 이 고을에 처음 들어오신 조상이다. 이제 그 자손이 이미 십여대에 수백호가 되었고 또 각지로 흩어져 있으면서도 시·서예에 힘쓰고 예교를 숭상하여 한 고을의 명문거족이 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면암공의 남아있는 음덕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전하여 옴이니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뜻이 있고 기개가 많으신 분으로 성동(成童)전에 이미 자기를 다스리는 학문에 정신을 씀으로 세종의 왕실이 밝을 즈음에 일찍이 유교를 연구하는 학문인으로 뽑힘을 입어 벼슬이 삼조좌랑(정6품)에 이르렀으며 또 여러번 나아가 재상이 되었으니 이르는 곳마다 정사를 잘한다는 명성을 떨쳤으며 때로는 정사에 그릇됨을 보면 꿋꿋하게 항의하는 글로 죄목 하나하나를 들어 말하고 개혁할 것을 청하니 임금님이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시며 재상이나 대신이 되어 정사를 맡아보는 재상이라 하였다.
무진년에 이르러 숙부 안효공의 모함으로 옥사를 만났을때 공이 직언으로 간하니 미움을 받아 당장 남쪽으로 귀양되었다. 오년간을 위태롭게 살면서 보성으로 옮기고 사면을 받았으나 돌아서서 단종이 외지로 쫓겨나는 것을 전해듣고 영달의 뜻을 끊고 이 마을에 숨어 살면서 술단지 마시며 편안하게 지냄을 만족하게 여기셨다. 세조가 여러 방면으로 찾아서 차사가 세번이나 왔어도 나아가지 아니하시니 종제이신 공숙공이 조정에 나아가기를 강하게 권하였으나 또한 응하지 아니하고 말씀하시기를 벼슬만 높이 올라 하는 일 없이 녹을 먹으면 침체하게 지내면서 마음 편함만 같지 못하다하여 이에 암석이 우거진 밭두렁에다 나무사이에 정자를 만들어 살면서 서로 뜻을 나타내시고 세상 일은 묻지도 않으셨으니 어떠한 사람이 있어 이러한 일을 하겠는가. 돌아가실 무렵에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명정에는 다만 임천거사라고만 쓰고 관직은 쓰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유연히 서거하시니 때는 성종 24년 계축이다. 부고를 들은 임금께서는 아깝고 애처롭게 여기시고 관원을 보내어 후한 부의하시고 국지사를 보내어 길한 땅을 가리어 편하게 계시게 하고 특별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정3품) 겸 경연참찬(정三품) 벼슬을 증하셨다. 슬프도다! 이와같은 조상이 있다면 뙤놈들의 지역에 있어도 십여대를 지나도록 남아있는 명성이 있을 것인데 우리 보성이 서울이 멀다고 하여도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왕성하여 합장 배례함을 따르는 상격 고을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다.
공의 후예들이 이어 가기를 끊이지 아니하고 가업을 이어 받으니 길게 이어지고 오래토록 전하여 지리라. 공의 큰 아들은 유눌이니 벼슬은 첨정(종四품)이요, 둘째 아들은 유강이니 벼슬은 참봉(종9품)으로 이의(吏議)에 증 되었다. 모두 문행이 널리 알려졌으며 첨정의 후손으로 휘는 사렴이니 벼슬은 개공랑 봉상시 직장(종7품)이요 휘에 향수의 호는 성재이시나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키시고 휘에 남유이고 호는 두남이니 벼슬은 예절교위 훈련원 판관(종5품)이니 또한 법을 잘 지키고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라고 칭하였다.
근세에는 모암이라는 분이 있었으니 휘는 능표로 문장 도덕이 저명하여 사람들이 모두 추종하였으며 이의(吏議) 후손으로 휘에 상안은 사복시정(정3품)에 증되었고 휘에 능오는 생원으로 동지중추에 증되었으니 현인의 남아있는 명성은 장원하도다. 이제 모암공의 후손 경택씨가 종중의 종의를 수렴하고 나에게 와서 글월을 구하니 그 뜻이 어찌나 가상하고 고향을 자랑스럽게 빛내어 후손들로 하여금 이를 고찰하고 공경스러운 생각으로 영세토록 계승케함을 기약함이라 하니 나는 사양할 수 없어 삼가이 그분의 행적을 근거로 하여 이와같이 씀으로써 나의 책임을 완수하였다.

대한 광복후 38년 계해 맹춘 일
성주 이백순 지음
후손 경 택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