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조 전서공(휘 지백)행적

4세조 전시공 휘 지백 제단


원종공신록권(개국) 심지백


전서공(典書公)은 상호군공(上護軍公:諱 卿)의 3男으로 이름은 지백(之伯)이다.
공은 고려 말엽에 여러 관직(官職)을 두루 거쳐 사재시(司宰寺) 부령(副令)을 역임하였다.
사재시는 궁중에서 어물과 육류등 식료품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부령은 부책임자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측근에서 고려왕실의 어지러운 상황을 개탄하고 이를 바로잡기에 힘썼으며, 이태조(李太祖)의 개국과정에서 공훈(功勳)을 세워 1397年(太祖 6年 丁丑) 10月 개국공신(開國功臣) 추가책정때 개국 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정되어 녹권(錄卷)을 받았으며 이때 사전(賜田) 15결(結)도 함께 하사받았다. 공의 녹권(錄卷)은 그 후손이 오래도록 잘 보존(保存)하여 현재 국보(國寶) 69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1398年 이태조가 정종(定宗)에게 양위하고 함흥(咸興)으로 갈때 太祖의 신임(信任)이 두터웠던 공은 호종(扈從)으로 동행하여 보좌(補佐) 임무를 수행하셨다. 1399年(定宗 1年 己卯) 1月 봉렬대부(奉烈大夫) 사재시(司宰寺) 소감(小監=從4品)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이어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正3品)에 제수(除授)되었다.
1400年 이태조가 함흥에서 서울로 돌아올때 왕자들의 불화와 싸움을 원망스럽고 애통하게 생각한 공은 동행하지 않고 그곳에 잔류하였다.
그리고는 삼공신(3公臣) 즉 전서공(典書公)과 안동군(安東君:金哲)과 화의군(和義君 金成富)은 함께 행동할 것을 결의하고, 1401年(太宗 元年 辛巳) 북향(北向)하여 단천(端川) 땅으로 옮겼는데 공은 경치가 좋은 운주산(雲住山) 아래에 삶의 자리를 정하였다. 식견(識見)과 도량(度量)이 넓었던 전서공은 단천땅에서 항시 윤리도덕(倫理道德)을 강조하였으며 적선(積善)을 베풀면서 여생(餘生)을 보냈다.
배위(配位)는 평창이씨(平昌李氏)이며 두분의 산소는 단천군 파도면 사동리(波道面 社東里) 운주산 아래에 계좌(癸坐:거의 南向)로 쌍봉이다. 아들은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는 감찰공(監察公:諱 彦龍)이고 차자는 진용부위공(進勇副尉公:諱 彦仲)이며 그 후손들은 단천(端川) 三水갑산(甲山) 길주(吉州) 명천(明川) 성진(城津) 함흥(咸興) 등지에서 관북(關北)의 대족(大族)으로서 명성(名聲)을 떨치며 세거(世居)하였다. 입북시조(入北始祖)인 전서공의 음덕으로 단천군내에서는 인구수(人口數)에서 으뜸을 차지했을뿐 아니라 가장 훌륭한 가문(家門)으로 소문나 있었다.

原從功臣 錄券
 국보 제69호
 동아대학교 소장
1397년(태조6) 10월에 공신도감에서 왕명을 받아 沈之伯에게 내린 녹권
이 녹권은 조선초기의 것으로서 이두문이 많이 사용되어 그 문체와 내용이 귀중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목활자를 사용한 점이다.
이 녹권은 상태가 완전한 것으로서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녹권중 으뜸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