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석성산소 사적

용인군(龍仁郡) 구성면(駒城面) 동백리(東栢里) 석성산하(石城山下)에는 십육세조(16世祖) 贈領議政公(諱 涑)을 爲始하여 여러 先祖님들의 묘소(墓所)가 모셔 있다. 그런데 석성산(石城山)을 점유(占有)하게된 연유(緣由)는 20世祖 咸陽郡守公(諱 能定)의 記錄에 依하면 이러하다. 석성산하(石城山下) 이곳 산지(山地)는 本來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소유(所有)로서 승지(承旨)를 지낸 이일익씨(李日翼氏)의 제향장소(祭享場所)였다. 연안이일익씨(延安李日翼氏)는 贈領議政公(諱 涑)의 從祖父인 廣州府尹公(諱 棇)의 사위인 남양홍기서(南陽洪箕敍)의 매부(妹夫)였으며 또한 이일익씨(李日翼氏)는 贈領議政公(諱 涑)의 再從인 宜寧縣監公(諱 溥)의 장인(丈人)이다. 宜寧縣監公(諱 溥)의 아버님은 亦是 宜寧縣監公(諱 若潢)이고 祖父는 廣州府尹公(諱 棇)이시다. 그래서 이일익씨(李日翼氏)와 우리 沈門과는 이중(二重)으로 사돈간이 된 셈이다. 그리고 父子間이 의녕현감(宜寧縣監)을 력임(歷任)했기 때문에 당시(當時)사람들은 대의녕(大宜寧) 소의녕(小宜寧)이라 稱하였다 한다. 홍기서(洪箕敍)의 아들이 상배(喪配)를 當했을 때 고모부(姑母夫)인 이일익씨(李日翼氏)에게 청(請)하여 장사(葬事)를 지내어 석성산하(石城山下) 一部가 홍씨산(洪氏山)이 되었다. 그후 小宜寧公(諱 溥)께서 兄嫂 林川趙氏(忠淸兵使公 諱 澍의 配位)가 別世했을 때 丈人인 이일익(李日翼)에게 당부(當附)하여 이곳에 장사(葬事)지내니 石城山下 일부(一部)는 심씨산(沈氏山)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本來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산지(山地)였던 석성산하(石城山下)의 東쪽은 남양홍씨(南陽洪氏) 山이 되고 西쪽은 청송심씨(靑松沈氏) 山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五年後인 癸酉(1693 肅宗19)年5月 25日에 16世祖 贈領議政公(諱 涑)께서 別世하셨다. 이때 當年 20歲인 淸獻公(諱 宅賢)께서 求山次 龍仁고을에 내려가 하마비점(下馬碑店)에서 휴식(休息)을 취할 때 점주(店主)로부터 석성산하(石城山下) 홍씨산공지(洪氏山空地)에 길지(吉地)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점주(店主)의 말을 들은 청헌공(淸獻公)께서는 小宜寧公(諱 溥)을 찾아가서 장지(葬地)를 청(請)하니 소의녕공(小宜寧公)께서는 쾌(快)히 허락(許諾)하셨다.
소의녕공(小宜寧公)의 허락(許諾)을 받은 청헌공(淸獻公)께서는 마을의 어느 집 아래에 吉地를 택(擇)해 놓고 형제(兄弟)분과 함께 8月5日에 발인(發靷)하여 그 다음날 사시(巳時)에 장사(葬事)지냈다. 장사(葬事)지내려고 광(壙)을 판 자리가 집 바로 아래인 것을 보고 소의녕공(小宜寧公)께서 크게 놀랐으나 지친(至親)의 정의를 잃지 않고 그대로 避해 버렸다. 그래서 나이 어린 청헌공(淸獻公) 兄弟분들께서는 父親의 유택(幽宅)을 명당(明堂)에 잡을 수가 있어 그후 제자손(諸子孫)이 영달(榮達)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地師들이 말하기를 복인(福人)이 길지(吉地)를 만나는 法인데 복인(福人)이 되려면 적덕(積德)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거니와 贈領議政公(諱 涑)께서 平素 적덕(積德)을 하셨기 때문에 길지(吉地)를 만나게 된 것이라고 후세(後世)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때부터 石城山下 東栢里는 우리 門中의 宗山이 되어 여러 先祖님들의 유택(幽宅)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후 이곳에는 贈領議政公(諱 涑)의 配位 初溪卞氏 17世祖 潭陽府使公(諱 啓賢)과 配位完山李氏 17世祖 學生公(諱 夢賢)과 配位坡平尹氏 18世祖 光州牧使公(諱 鐸)과 配位林川趙氏 18世祖 永川郡守公(諱 銶)의 初配位平山申氏 그리고 19世祖 吏曹參判公(諱 履之)와 兩配位咸從魚氏 光山金氏등 여러 어른들을 차례로 모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