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재중건기

모의재 (휘 정 재실)
소재지: 경북 청송군 부남면 대전리



옛 임진년 탄금대의 싸움은 백성의 분한이 되도다. 태평을 누리는 시대에 갑자기 강한 적을 만나서 적도를 막아내지 못하고 마침내 수만정졸로 하여금 일시에 함몰당하고 무관과 문관이 지략과 의열로 가히 맞서 싸운자는 거의 전멸을 당했다. 지금도 그 곳을 지나가는 자 옛 자취를 생각하면 문득 가슴이 찢어질것 같다.
모의심공의 순절지사를 돌이켜 생각하면 충의의 거룩한 자취는 세상을 덮고 공지(군, 읍지)에 실려 길이 빛이 나나 약관의 장년에 초망(벼슬 못한 사람)으로 순절하였으니 한이 되지 아니치 못할지로다.
부군의 휘는 汀, 고려조 전리판서를 지낸 휘 元符 호 악은 선조의 7世孫이시다.
공은 일찍부터 출중한 기질이 있어 담론하시기에 의기가 넘치고 지조와 절개가 있으셨으니 임진란이 일어나자 곧 소매를 떨치고 일어서서 말하기를 나라에 큰 난이 일어났거늘 내가 충훈의 집 후예로써 비록 벼슬을 못한 선비의 신분이나 마땅히 힘을 다하여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리라 하시고 가동 수십인과 향리장정 약간명을 거느리고 바로 문경 마포로 달려가서 또한 인근 군병을 거느리고 신충열공의 충주진중에 달려가니 이미 적세가 졸급한지라 드디어 탄금대 밑에 나아가서 배수진을 쳤으나 전력이 미치지 못하여 대군이 무너지는지라. 공은 이에 죽기를 각오하고 발길을 돌리지 않으시고 앞뒤 분별없이 칼로 공중을 갈기면서 진중에서 순절하였으니 슬프도다. 이때 공의 나이 25세였다. 그러나 충의 위열사가 다만 수개 읍지에 있을 따름이니 어찌 후손의 한 되는 바가 아니리오.
청송부의 남쪽 30里밖 익동 산밑에 날아갈 것 같은 높은 집이 있으니 이가 곧 모의 심공의 추모재로다.
슬프도다. 부군이 숨진 후 시체도 반구 못하고 의리로서 나산해좌원에 장례하고 묘 산기슭 아래 옛날 재숙을 지어 있었으나 여러번의 창상이 변하는 중에 도복의 근심을 면하기 어려운지라. 종중이 합의하여 다시 세워 준공을 하니 앞은 장마루이며 동서 양실이며 온양이 적의하고 주사도 갖추었다. 비록 옛 재실에는 미치지 못하나 웅장한 법도를 이루었고 재실과 서당을 아울러 이루었도다.
재실 남쪽에는 절재의 낮은 산봉이 재실을 향하여 머리를 읍하고 서북 장등은 구비구비 돌아 재실을 옹호하고 동북 요산은 회룡야잠(回龍也岑)이요. 동남 무등에는 멀리 매봉이 날아들고 그 기슭의 끝이 야잠의 기슭에 근접(近接)하여 스스로 동문(洞門)을 이루었으며 수목이 창울하고 그 앞에 냇물이 흘러가니 이에 올라 한번 보는 자 큰 소리로 아름답도다. 하늘이 내린 명지로다. 경치는 무릉도원을 능가하며 처한 곳은 진나라 함곡관과 같다고 탄복하였다. 부군의 충성의 열은 족히 백세에 높이 드러났고 이제 또 재당을 중건하였으니 이어 수호하는 책무를 자손에 전해서 중건할 때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면 거의 그 쇠퇴하지 않음이 무궁하리라. 재실의 소감을 이로서 한다.

1935年 乙亥 竣工
중순후기 방후손 명택 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