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운재와 곡산공신도비명

학운재 (곡산공 휘 수 재실)
소재지: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학운리


곡산공 신도비



余猥述漢城右尹靑川君夷敬沈公諱瀚大碑之銘矣其曾孫諱瀚字仲陽亦有邃學淸德爲人所誦慕亦可謂世類也靑松氏繼世相閣右閥于東諱德符左政丞靑城伯定安公諱溫領議政靑川府院君安孝公諱澮領議政靑松府院君恭肅公高祖以上也祖曰順徑漢城左尹靑城君胡襄公考曰興源成均進士妣靈山辛氏敎官世卿女曰贈吏判達源坡平尹氏吏判希仁女生考妣也中宗壬午十一月二十四日生公于金浦之藥山天姿雍容性廉介不屑世間事好學力行早有令名 仁宗乙巳蔭瓦署別提明宗戊申轉司僕寺主簿庚戌除金化縣令歷宰文義南平政平訟理吏畏民惠其在南平治績尤著至有立石去思乙丑遷社稷令至平市令丁卯除通訓大夫谷山郡守苽滿無意榮途因次歸去來辭歸田里就龍山之上築水雲亭命酒賦詩種花卉養禽魚優遊樂志以沒其世宣廟庚辰八月二十五日壽五十八葬金浦郡陽村面鶴雲里鶴峴丑坐遺文甚多逸於壬燹傳一絶詩曰午睡方酣日己暉紫門剝啄覺前期扁舟己令陳紅粉要使河君擇一奇公內行尤篤事判書公洞屬無違志及出后痛進士公之有德無命每夫日致誠如在生庭貞夫人尹氏早寡守志 公與三兄鎭縣監鎡僉正銓監司俱專誠而榮養一世榮之以三子追贈贈公資憲大夫戶曹判書配 贈貞夫人竹山朴氏吏郞宗豪女副正勳孫生與公同年沒後公十二年壽七十墓祔生五男曰友聖縣令曰友賢訓導曰友信僉正殉節壬亂錄宣武一等 贈兵叅曰友寬司禦曰友仁都事縣令生三男詹諅進士譍出后訓導生二男訒訓兵叅生三男詡贈吏叅忠義誡敎官司禦無嗣系譍都事生四男後河將仕郞讚建信都尉壬亂被押日本諔丙子殉節江都 贈掌樂正詥縣監壽僉樞以下克昌熾未艾嗚呼公具可仕之才値可仕之時且門欄輝赫布列銓要何求不得何欲不遂顧乃所欲不在此薄試歛退寓樂山水以沒其世而無悔其遺風餘韻足以風勵者遠則公可謂高於人一等豈往而不返者比哉後孫相得訪余西山之白雲軒謬托顯刻之銘固不堪役竊有所曠感者不辭而銘曰
允矣我公磊落出群不器之德有斐之文筮仕登朝心切忠君內而郞署人服稱職外而郡邑民歌瑞麥素性廉介無意榮祿薄試牛刀晧然賦歸龍山有田桑麻依依水雲有亭風月無禁優哉悠哉樂我眞襟崇帙之贈身後之榮報善不忒天理有常遺風不沫山水俱長

歲壬戌黃花節
  前成均館典學 居昌 愼思範 謹撰



곡산공신도비명병서(번역문)
나 외람되이 한성우윤 청천군 이경심공 대비의 명(銘)을 지었다. 그 증손인 휘 수(鐩)자 중양(仲陽)이 또한 깊은 학문 맑은 덕행으로 사람의 송모(誦慕)한 바가 되니 선세를 닮은 자손이 아닐 수 없다. 청송심씨는 대대로 정승이 되어 동방의 명문이다. 휘 덕부(德符)는 좌정승 청성백에 정안공이요, 휘 온(溫)은 영의정 청천부원군에 안효공이요, 휘 회(澮)는 영의정 청송부원군에 공숙공이니 고조이상이다. 조부 순경(順徑)은 한성좌윤 청성군에 호양공이요, 부친 흥원(興源)은 성균진사요, 모친 영산신씨(靈山辛氏)는 교관 세경(世卿)의 딸이요, 증 이조판서 휘 달원(達源)과 파평윤씨 이조판서 희인(希仁)의 딸은 생가의 부모다. 1522년 중종 임오 11月 24日에 김포의 약산마을에서 출생하다.
천품이 옹용하고 성질이 청렴하여 세상의 일에는 상관이 없고 오직 학문을 좋아하고 실천에 힘을 써서 일찍이 영명을 떨치다.
1545년 인종 乙巳에 문음으로 와서별제(瓦署別提)가 되고, 명종3년 무신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옮기다.
1550년 경술에 금화현령을 비롯해서 문의(文義) 남평의 원이 되어 송사를 밝게 해서 선정을 펴다.
더욱 남평에서 치적이 있어 송덕비를 세웠다.
1565년 乙丑에 사직서령(社稷署令)이 되어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이르다.
1567년 丁卯에 통훈대부에 올라 곡산군수가 되다.
만기가 되자 다시 영도에 뜻이 없어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달리 짓고 곧 고향에 돌아와 용산(龍山)의 우에 수운정(水雲亭)을 짓고 술마시며 시를 읊고 화초를 가꾸며 금어(禽魚)를 길러 호연의 뜻을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니, 1580년 庚辰 8月 25日이요 수는 58이다.
김포군 양촌면 학운리 학현 축좌에 장사하다.
지은 글이 많았으나 임진난에 없어지고 일수의 시가 전해지다.
「낮잠을 달게 자니 날이 밝다. 가시문의 인적소리 전에 약속한 바를 알았네, 편주(扁舟)가 이미 단장을 마치니 사공으로 하여금 한 소식을 보내네」 공은 내행이 더욱 독실하여 부친인 수찬공을 섬기되 조심해서 뜻을 어긴 일이 없고 출계해서는 양아버지 진사공이 덕이 있고도 명이 짧음을 슬퍼하여 매양 제일이면 치제해서 정성을 다하고 생모인 정부인 윤씨가 일찍 과부가 되어 뜻을 지키니 공이 세 형님이신 현감 진(鎭) 첨정 자(鎡) 감사 전(銓)과 같이 다 사또가 되어 영양(榮養)으로 모시니 일세가 다 부러워 하더라.
셋째 아들 우신(友信)의 공훈으로 공에게 자헌대부 호조판서의 증직이 내리고 예장되다.
배위는 증 정부인 죽산(竹山)박씨니 이조정랑 종호(宗豪)의 딸이요, 부정(副正) 훈(勳)의 손녀라.
생년은 공과 같고 12년 후에 돌아가니 수 70이요, 묘는 합장하다.
五남을 낳으니 우성(友聖)은 현령이요, 우현(友賢)은 훈도요, 우신(友信)은 첨정으로 임난에 순절하여 선무원종1등공신에 병조참판을 증직하고 우관(友寬)은 사어(司禦)요, 우인(友仁)은 도사(都事)라 현령이 3남을 낳으니 첨(詹) 기(諅)는 진사, 응(譍)은 출계하고 훈도가 2남을 낳으니 인(訒)과 훈(訓)이요, 병참이 3남을 낳으니 허(詡)는 이조참의를 증직하고 극()은 충의위요, 계(誡)는 교관이며 사어는 아들이 없어 응(譍)을 입계하고 도사가 4남을 낳으니, 후하(後河)는 장사랑 찬(讚)은 건신도위로 임난에 일본에 압류하고 숙(諔)은 병자에 강화에서 절사하여 장악정의 증직을 받고 합(詥)은 현감이니 수직으로 첨중추가 되다. 이하의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여 다 기록치 아니한다.
슬프다 공이 벼슬할 수 있는 재주가 있고 벼슬할 수 있는 시기를 만나고 또 빛나는 문벌요직에 나열하니,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여 무엇을 하고자 해서 이루지 못하리요마는, 어쩐지 소욕이 이 벼슬에는 있지 아니하여 잠간 재주를 시험하고 물러가 산수에 낙을 부쳐 그 세상을 맞아 후회함이 없으니, 그 유풍과 여운이 족히 후세를 장려하고 감화됨이 많으니 공은 가히 보통사람에 뛰어나서, 한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람과는 비할바가 아니다. 후손 相得이 나를 서산의 백운헌(白雲軒)으로 찾아와 현각의 명(銘)을 부탁하니 진실로 감당치 못하나 마음에 감동된 바가 있어 사양치 아니하고 명을 쓰노라.
성실하고 아름답다 공이여 높아 보통에 뛰어나고,
원만한 덕으로 빛이난 글월(文)이네.

벼슬길에 오르니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안으로는 낭서벼슬, 사람은 성실을 탄복하며,
밖으로는 군수 행정, 백성은 태평을 노래하네.

청렴한 성품에 영록은 뜻이 없고,
잔간 큰 솜씨 보이고 홀연히 귀향했네.
용산밑의 밭에는 상마(桑麻)가 무성하고,
수운의 정자에는 풍월을 금할이가 없으니,
이 산수 사이에 내 마음이 즐거워라.

높은 벼슬의 증직은 신후의 영화이며,
선(善)을 갚음은 천리가 틀림이 없네.
끼친바람 다 하지 아니하여 산수와 같이 기르리.

1982年 壬戌 국화절
     전성균관전학 거창 신사범은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