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재와 묵헌공묘갈명 |
보현재 (묵헌공 풍 재실) |
公諱灃字浩甫默軒其號也我沈氏籍慶尙道靑松府鼻祖諱洪孚仕高麗文林郞衛尉寺丞靑己君入我 朝諱德符左政丞諡定安公五代祖生諱澄仁壽府尹是公高祖也曾祖諱石雋軍資判官 贈戶曹判書諡良惠祖諱璿京畿監司 端宗遜位棄官歸豊壤自號忘世亭考諱安智海州牧使 贈兵曹叅判前後妣慶州金氏 贈贊成從直女泗川睦氏郡守哲成女公睦氏出也公以 成宗壬寅生天資高明學問夙就從趙靜菴先生學經禮自修素所存養不以富貴貧賤憂憾死生易其所守三十餘承蔭至正郞及己卯禍作大司成金公湜公之姨兄也徃省姨母生朝是日公亦被逮金公二子皆己合子去矣吏質諸金公門人李信則信曰此金湜親信之人也後信力救之袞貞輩以同謀證供杖流鐵山移于羅州睦玄軒世秤寄詩鵩舍曰明時尙有長沙恨遠客方知宋玉悲蒼茫消息憑誰問雙鯉迢迢恐亦遲可悲也旣放公絶意當世因遯于羅傷痛時事上靜菴伸冤疏不報以 明宗癸亥九月十日卒享年八十二墓羅州治之西五里寶峴洞艮原前配咸陽呂氏展力副尉伯溫女墓失傳後配羅州羅氏瑛女祔男光憲金海府使錄宣武原從功孫男化龍自是後承繁衍遂爲羅之望族自公始也嗚呼公之沒今三百有餘年矣內行之純備學識之造詣職官之歷踐或有闕焉惟己卯一節載之野乘記於邑誌公之名與諸賢並稱上不肖於趙靜菴下無愧於金大成則不賢而能如是乎之後孫遠杓屬余爲銘公於余爲旁親景仰久矣不敢以不文辭之銘曰文正爲師大成爲兄從學兩門理義斯明道州之厄自西而行綠章熱血爲誰悲鳴君子之藏鬱鬱錦城我銘不 永垂貞珉
癸卯春 이조정랑묵헌공휘풍묘갈명병서(번역문) 공의 이름은 灃(풍)이요 자(字)는 호보(浩甫)이며 묵헌(默軒)은 그의 호이다. 경상도의 청송고을을 본관으로 한 우리 심씨의 시조는 그 이름을 홍부라한 고려때의 문신으로 문림랑위위사승(文林郞衛尉寺丞)의 벼슬을 역임한 당시의 인물이다. 그리고 아조에 있어서는 좌정승을 지내시고 정안(定安)의 시호를 받은 명신 휘덕부(諱德符)는 公의 오대조(5代祖)이며 또 그의 아들로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지낸 징(澄)은 公의 고조(高祖)이다. 그의 증조(曾祖)로 석준(石雋)은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의 증직(贈職)과 양혜(良惠)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경기감사(京畿監司)를 역임(歷任)하면서 단종(端宗)의 손위(遜位)를 통탄(痛歎)하여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양주(楊州)의 풍양(豊壤)으로 돌아가 자호를 망세정(忘世亭)이라 칭(稱)한 선(璿)은 그의 조부(祖父)이다. 考의 이름은 안지(安智)로 해주목사(海州牧使)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叅判)의 증직(贈職)을 받았고 妣는 두분으로 찬성(贊成)의 증직(贈職)을 받은 경주김씨 종직(慶州金氏 從直)의 女와 군수(郡守) 벼슬을 역임(歷任)한 사천목씨 철성(泗川睦氏 哲成)의 女로 公은 목씨(睦氏)의 소생이다. 公이 成宗13年(1482年) 壬寅에 태어나 그의 자품(資品)이 고상(高尙)하고 학문(學問)이 숙성(夙成)하였을 뿐아니라 일찍 정암조선생(靜菴趙先生)을 사사(師事)하여 경례자수(經禮自修)의 깊은 존양(存養)을 쌓았다. 이로 인하여 빈부귀천(貧富貴賤)이나 생사우척등(生死憂慽等)의 모든 세사(世事)에 조금도 그의 지킨 바를 변하지 않은 견고한 지조(志操)를 갖추었다. 公의 나이 삼십여세(30餘歲)에 음사(蔭仕)로 정랑(正郞)의 벼슬에 올랐으나 불행(不幸)히 기묘사화(己卯士禍)라는 국가(國家)의 변고(變故)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이 사화(士禍)에 련루(連累)된 당시의 대사성 김식(大司成 金湜)은 公의 이종형(姨從兄)으로 서로의 지기(志氣)가 투합(投合)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그 어느날 이모(姨母)의 생신(生辰)을 살피기 위해 김식(金湜)의 집에 들었다. 이때 김공(金公)의 집을 수색중인 포졸(捕卒)들의 부시검문(不時檢問)에 依해 현장에서 붙잡혀 가는 억울함을 당하게 되었고 김공(金公)의 두 아들도 이미 잡혀간 상태였다. 그리고 公의 죄장(罪狀)을 밝히기 위해 김공(金公)의 문인(門人)인 이신(李信)을 불러 그의 증언(證言)을 들었다. 이신은 「나의 스승인 김식(金湜)이 누구보다도 가깝고 사랑하는 친신(親信)의 사람이다」라고 말하여 그의 무죄(無罪)를 역설(力說)하였고 그 이후(以後)에도 公의 구출(救出)을 위해 많은 노력(努力)을 하였다. 그럼에도 남곤, 심정(沈貞~豊山人)등이 끝내 공모(共謀)의 혐의를 조작하여 철산(鐵山)으로 장류(杖流)하였고 그후(其後) 나주(羅州)로 옮기시었다. 이때 김공(金公)의 문인현헌목세칭(門人玄軒睦世秤)이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일월(日月) 처럼 밝은 이 세상(世上)에 이처럼 억울한 귀향의 恨을 만나게 되니 원방(遠方)의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옛날 송옥(宋玉)의 슬픈 마음을 깨닫게 되었도다. 예측할 수 없는 그대의 머나먼 소식을 그 언제나 들을 수 있을는지 쿗쿗한 마음으로 보내는 이 한장의 편지가 생각이외로 늦었도다」라는 애절(哀切)한 시구(詩句)를 배소(配所)로 보내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비통(悲痛)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후 公은 귀향에서 풀리었으나 세상(世上)과의 인연(因緣)을 끊고 어지러운 세태(世態)을 원망하며 부우(不遇)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언제나 당시의 어지러운 세사(世事)를 통탄(痛歎)하는 비분(悲憤)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정암(趙靜菴)의 억울함을 호소(呼訴)하는 신원(伸冤)의 상소(上疏)를 여러차례나 올렸음에도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는 천추(千秋)의 恨을 남기게 되었다. 公의 나이 82歲인 明宗癸亥 9月10日 세상(世上)을 버림에 따라 나주치소(羅州治所) 西쪽5里의 거리인 보현동간원(寶峴洞艮原)에 묘소(墓所)를 定하였다. 그리고 전배(前配)는 함양려씨(咸陽呂氏)로 전력부위(展力副尉) 백온(伯溫)의 女요 墓는 실전(失傳)하고 후배(後配)인 나주나씨(羅州羅氏)는 영(瑛)의 女요 묘(墓)는 합폄(合窆)이다. 公의 1男으로 선무원종(宣武原從)에 오른 김해부사 광헌(金海府使 光憲)이 있고 그 뒤를 이은 손남 화룡(孫男 化龍)이 있다. 그후 후손이 代를 이어 날로 번창하여 나주의 거족이 되니 이는 모두 公의 이러한 음덕에 依해 이루어진 결과(結果)이다. 슬프다. 公이 이 세상(世上)을 버린지도 어언 삼백여년(300餘年)의 세월(歲月)이 흘렀다. 이로 인하여 그의 내행(內行) 및 학문(學問) 관직등(官職等)의 사적(事蹟)을 구명(究明)할 수 있는 문헌상(文獻上)의 실전(失傳)으로 다소(多少)의 누락(漏落)이 없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일절(一節)에 있어서는 이의 사실(事實)이 야승(野乘) 및 읍지등(邑誌等)에 기록(記錄)되어 당시(當時)의 여러 어진이와 함께 그의 이름이 병칭(並稱)되어 있다. 위로는 정암조선생(靜菴趙先生)을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동천김대성(東泉金大成)에 부끄러움이 없는 정대(正大)한 지절(志節)을 지키셨다. 어찌 德을 쌓은 참다운 어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어느날 公의 후손(後孫)인 원표(遠杓)가 나를 찾아와 그의 갈명(碣銘)을 부탁하였다. 내 방친(傍親)의 처지(處地)로 公의 덕의(德儀)를 경앙한지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내 비록 이러한 글을 지을만한 능력(能力)이 없음을 알면서도 敢히 그의 請을 사양(辭讓)할 수가 없었다. 이로 因하여 부득이(不得已) 다음의 명문(銘文)을 지어 그 사적(事蹟)을 밝히는 바이다. 문정공(文正公)은 조정암(趙靜菴)을 스승으로 섬기었고 대사성(大司成)인 김동천(金東泉)을 이형(姨兄)으로 모셨도다. 정암 동천(靜菴 東泉) 두 문하(門下)에 부지런히 종학(從學)하여 이 세상(世上)의 참된 의리(義理)를 정찰(精察)하게 밝혔도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연루(連累)되어 유배생활(流配生活) 겪으면서 철산(鐵山)이란 고을에서 라주(羅州)땅에 옮겼도다. 임금에게 올린 상소 깊은 열기(熱氣) 가득하니 선생(先生)위한 그 애정(哀情)이 한이 없이 높았도다. 道를 닦은 어진 군자(君子) 아름다운 그 모습이 금성(錦城)이란 이 지역(地域)에 울창(鬱蒼)하게 풀렸도다. 내가 지은 이 명문(銘文)이 옥돌위에 새겨져서 천만년(千萬年)이 다되도록 길이길이 傳해가리.
癸卯春(1903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