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정

만우정공 휘 효연 재실
소재지:경북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晩愚亭記
昔麗王之祚訖忠臣義士多棄官自靖以沒杜門洞七十二賢最其彰明較著者也靑城伯之弟岳隱先生其一先生有肖孫三人仲曰孝 靑川君有祖風自號晩愚構亭於靑松府之南甘淵之里棄貂金若脫獘履足不跡闤闠一步惟瀧岡是依惟丹雘是勤雲仍繁衍今至數百戶之多居者敬過者式皆嘖嘖稱晩愚亭之遺虛瞻望山低回而不忍去嗚乎此孰使之然哉然天下萬古無不亡之國而亡國之民等隸屬俘虜何暇語隱哉而含冤忍慟迫不得已焉則毋寧依祖先邱墓之鄕讀匪風下泉之詩無擭罪於秉彛之類可矣況其棟宇丹雘尙巋然煥然乎哉近先生之裔燦之自松來修其譜要余弁其卷將歸鄕又請記其亭楣余曰余愚矣廢棄人事亦晩矣杜門農圃掃先人之墓亦久今記此亭不覺不如人之歎也

辛酉小雪節
嘉善大夫 前香山郡守 波澄 尹甯求
書于 農圃 黃花軒
歲癸亥流頭節
晩愚亭重修記 有司 能濟 能濬 書



만우정기(번역문)
옛 고려의 국운이 다할 때 충신의사들이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편한 곳을 찾아 은둔할 때 두문동 72현이 가장 밝게 드러났다. 청성백의 아우 악은 선생도 그 중의 한 분이신 청송심씨 4世祖 휘 元符 고려전리판서이시다. 선생에 초손 세분이 있었으니 차자의 휘는 효연 청천군이시며 일찍이 덕행과 공훈이 많으셨으니 호는 만우이시다. 청송부의 남쪽 감연리에 후손들이 정자를 지었으니 이가 곧 만우정이다. 선생은 관직 버리기를 헌 신짝 같이 버리시고 한발자욱도 성밖 출입을 아니하시고 강과 산을 의지하시고 오직 음덕을 쌓으시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때부터 후손이 번연하여 이제는 수백호의 집성촌에 이르렀다. 만우공의 유덕을 이곳에 사는 자도 공경하고 지나가는 과객도 공경하며 모두가 만우정의 유허를 일컬어 크게 칭송하며 산을 바라보고 머리숙여 사색에 잠겨 차마 돌아가지 못하였도다. 슬프도다. 이는 누구의 탓으로 그렇게 되었으리오. 그러나 천하만고에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노예와 포로가 되는 것이어늘 어찌 느긋하게 숨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원통함을 먹음고 통박함을 참는 것이 부득이한 일인 즉 차라리 선조님의 묘소가 계시는 고향을 의지하여 비석지심(체념한 마음)으로 비풍 하천의 시를 읽으면서 지조있는 선비들에게 죄를 짖지 않음이 옳을 것이어늘 하물며 크고 화려한 집에서 부귀영화를 누릴손가. 근자 선생의 후예 찬지씨가 청송으로부터 그 계보를 닦아와서 나에게 그 서문을 요청하고 또한 그 정자의 기문을 청하거늘 내가 말하되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인사를 폐기한지 또한 오래되었도다. 두문농포에서 선인의 묘소를 성묘한지도 또한 오랜지라. 이제 이 정자를 기하고 보니 사람의 도리를 못한 것을 깨닫지 못한 점을 탄식하도다.

신유 소설절
가선대부 전향산군수 파증 윤녕구 서우 농포 황화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