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보(第8回) 번역문

禮曰尊祖故敬宗敬宗故收族譜者收族之一事也惟我靑松之沈爲世巨族世積厥德福祿延綿在國而三爲 王后四尙公主在朝而十三相臣出焉若其道學忠節之士銀緋臺省之官接武前後不可殫記非 祖先之積累啓我萬子孫則能如是乎嗚呼盛矣譜始於嘉靖乙巳再于壬戌三于戊寅四于己丑五于壬辰六于癸卯七于辛巳上下三百五十餘年之間凡七回矣先儒所謂家之信譜猶國之信史者於此可信也余嘗有意於修譜而今距辛巳四十年矣年代漸遠子孫益衆而不能續修於遠宗近族之系則幾何而不路人視哉辛巳之譜仁壽府尹公一派有異議不相合非收族之意也至是諸宗議定復合不亦幸乎三年工告訖合宗支七十餘派爲二十四冊吁其多矣迺告諸宗曰人有恒言曰同出於一人之身身出於一人矣心獨非出於一人之心乎自一人之身而爲千百人之身自一人之心而爲千百人之心形則異而心則同無乃萬殊而一本者耶凡我同譜者無別貴賤無分遠近唯以 先祖之心爲心則雖千百世猶一心也尊祖敬宗之義其在斯乎其在斯乎余旣忝有司今所言則 先祖之心也可不勉乎哉遂書以爲序歲庚申重陽後孫嘉善大夫前內部協辦相翊謹序
(번역문)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조상을 존숭하는 고로 일가를 공경하고 일가를 공경하므로써 겨레를 수합한다』고 하였으니 족보는 종족을 수합하는 일이다. 우리 청송심씨는 세상의 훌륭한 거족(巨族)으로서 대대로 덕을 쌓아 복록(福祿)이 끊이지 않고 나라에 있어서는 세분의 왕후가 되시고 네 분이 공주의 배필이 되었으며 조정에는 열 세분의 상신(相臣)이 나오시었다. 또 도학과 충절이 있는 선비가 한림원(翰林院)과 상서성(尙瑞省)의 높은 벼슬이 전후로 상접하여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선조의 어진 덕이 널리 세상에 미치고 우리 많은 자손을 가르치어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아! 성하도다. 족보는 가정 을사년(명종1년 1545)에 시작하여 임술년(명종17년 1562)에 2회, 무인년(선조11년 1578)에 3회, 기축년(인조27년 1649)에 4회, 임진년(숙종28년 1712)에 5회, 계묘년(헌종9년 1843)에 6회, 신사년(고종18년 1881)에 7회를 중수하였으니 상하로 350여년의 사이에 모두 7회를 중수하였다. 선대의 선비가 이르기를 『집안의 믿을 수 있는 족보 있음은 나라의 믿을 수 있는 역사 있음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히 믿을만 하도다. 내가 일찍이 보책을 중수하는데 뜻을 두었으되 이제 신사년의 사이가 40년이나 오래되었다. 연대가 점점 멀어지고 자손이 더욱 많아져서 능히 먼 일가와 가까운 집안의 계통을 이어서 중수하지 않으면 얼마 되지 않아서 길가는 남으로 보지 않겠는가. 신사년의 족보는 인수부윤공의 한 파가 이의가 있어 서로 합보하지 못하였음은 종족을 수합하는 뜻이 아니다. 이에 모든 일가들이 다시 합보하기로 의논이 되었으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3년만에 일이 끝나니 종파와 지파를 합하여 70여파요. 24책이 되니 아! 참으로 많도다. 이에 모든 일가들에게 고하기를 『사람이 언제나 하는 말에 이르기를 「몸은 한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마음이 또한 그러하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부터 천․백사람의 몸이 되고 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천․백사람의 마음이 된다』고 하였으니 형제는 달라도 마음은 같고 오히려 만가지로 다르더라도 하나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무릇 나와 족보를 같이한 사람은 귀인과 천인을 가리지 않으며 멀고 가까움을 나누지 말고 오직 선조의 마음으로서 마음을 삼으면 비록 천․백대의 후라도 오히려 한 마음이 되리니 조상을 존숭하고 일가를 공경하는 뜻이 다 여기에 있음이라. 내가 이미 유사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였지만 이제 말하는 바는 선조의 마음을 본받았음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이를 써 머리말로 삼노라.
      

경신년(1920) 9월9일에
      후손 가선대부 전내부협판 상익은 삼가 서함 


始我有世譜歷年旣久屢易世而屢續刊也所以奠繫世所以辨昭穆所以合族立宗爲一家之惇史者厥有弘規懿範嗣守無替此我後承之可不勉慕而式遵哉我譜肇自衛尉丞公雲仍之受姓今二十餘世矣二十餘世來胚光趾烈曰勳庸曰德行曰節義曰文章全盛本朝鴻卿碩輔前後相望銘彛鼎而彪汗策者繩繩令緖實惟我衛尉公啓裕之此其所以爲我譜也譜以紀世一本萬支蕃孫衍曾又不可以數計而周知之則非舊刊所可據迨今增纂不其責亦更重乎始澤於是遍走京外再三收議集衆貳而一之宗盟於是復圓矣頃在丁巳夏與宜寧主事君成澤從決議圖成責其斤讎之任矣越明年夏余病不能乾役讓譜所于京城而成澤從亦辭去矣中間四五年譜事延拖將至見廢四面之責歸于刱始矣思不容已强扶衰病踰嶺千里再造寶川宗中更與成澤還任譜事而殫竭心力今此竣役寔爲吾沈之幸也編旣成諗于諸宗曰布濩熾昌環之東土沈爲族大親竭而宗移服盡而情踈謂之固然之勢也雖各千里離析忘忽慶吊邈然如塗人一展譜而誰不念其親睦哉蘇明允所以屢致意於此者盍思所以相勵具曰唯是爲之書歲壬戌七月旣望前主事始澤謹跋
(번역문)
우리가 족보를 처음 시작한지 여러 해가 지났고 여러 대가 바뀌는 동안 여러번 계속하여 발간하여 내려왔다. 계세(繫世)를 정하고 차례를 분별하여 종족(宗族)을 모아 일가를 만드는 까닭은 크고 아름다운 규범을 갖게 하여 이어 받아서 지키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 후손들이 힘써 사모하고 준수해야할 것이 아닌가. 우리 족보는 위위승(衛尉丞)공이 수성(受姓)한 이래로 지금까지 20여대가 되었다. 20여대가 내려오는 동안 환하게 빛나서 훈용(勳庸)과 덕행(德行)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이 조선조에 전성(全盛)하였고 높은 벼슬과 큰 학덕이 앞뒤로 서로 이어졌고 공신으로 책봉된 분이 계속 나왔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위위승(衛尉丞)공께서 열어주신 것이요 이것이 족보를 하게된 까닭이다. 처음에는 한 본이었다가 만가지로 뻗어 자손이 번창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어 두루 알려면 구보(舊譜)로는 근거할 수 없어서 지금에 이르러 증찬(增纂)하니 그 책임이 또한 중하지 아니한가.
시택(始澤)이 이에 서울 밖을 두루 돌아다니며 두번 세번 의논을 하였고 여러 의견을 하나로 묶으니 종맹(宗盟)이 이에 원만하여졌다. 지난 정사년 여름에 의령주사군(宜寧 主事君) 성택(成澤)과 더불어 결의에 따라 족보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더니 이듬해 여름에 내가 병으로 그 일을 맡을 수 없어 보소(譜所)를 서울에 양보하니 성택 또한 그만두고 갔다. 중간 4, 5년 동안 족보일이 연기되어 장차 폐하게 되므로 사방에서의 책임추궁이 처음의 한 사람에게 돌아오니 생각다 못하여 억지로 병든 몸을 이끌고 고개 넘어 천리길을 걸어서 다시 보천(寶川)종중으로 가서 다시 성택과 같이 보사(譜事)를 맡아 심력을 기울여 이제 일을 마치니 이것이 우리 심씨의 다행한 일이다. 족보책이 다 되자 모든 일가에게 고하기를 종족이 번창하여 온 나라에 퍼졌고 심씨는 대성이 되어 친함이 다하면 종족이 옮기고 복이 다하면 정이 소홀해지는 것은 본연의 형세이다. 비록 각각 천리 머나먼 곳에 떨어져 살면서 경조(慶弔)가 있어도 모르고 막연히 길에서 만난 딴 남처럼 여기다가 한번 족보를 펴보면 누가 그 친목을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소명윤(蘇明允)이 여러번 여기에 뜻을 둔 까닭을 어찌 생각하면 서로 힘쓰지 아니하리오. 하니 모두 옳다고 하므로 이에 쓰노라.
      

임술년 7월16일
      전 주사 시택이 삼가 발문을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