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현(천안현감) |
〈효부(孝婦)〉
박 씨(朴 氏):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요 일서면 심광하(一西面 沈光河)의 妻로 어려서부터 효순(孝順)하였고 출가(出嫁)해서는 시부모 섬기는데 성경(誠敬)을 다하였다. 시아버지가 일찍이 등창을 앓아 위독하였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침으로도 고칠 수 없고 약으로도 안되며 오직 고름을 빨아야 낫는다 하였다. 朴氏가 듣고 스스로 빨며 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 월여(月餘)를 계속 빨아 나으니 광하(光河)에게는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하고 효부(孝婦)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직첩(職帖)을 주었다. 〈열부(烈婦)〉 김 씨(金 氏):본관(本貫)은 양근(楊根)이요 심돈(沈墩)의 妻로 효부 朴氏의 증손부(曾孫婦)이다. 십칠세(17歲)에 출가(出嫁)하여 시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매사(每事)를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심돈(沈墩)이 젊어서부터 기질(奇疾)이 있어 정성껏 치료(治療)하였으나 죽으니 시부모가 돌아갈 때까지 잘 봉양(奉養)하였으며 상장제절(喪葬諸節)을 예법(禮法)에 의하여 치르고 나서 藥을 먹고 자진(自盡)하니 나이 60이요 남편이 죽은 뒤 10年이 되었다. 이 씨(李 氏):심형석(沈亨錫)의 妻요 심돈(沈墩)의 질부(姪婦)로 나이 17歲에 출가(出嫁)하여 언사(言辭)와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보통 사람보다 달랐고 형석(亨錫)의 조모(祖母)의 나이 팔십여세(80餘歲)에 매우 기특하다고 사랑하였는데 1年이 지나 형석(亨錫)이 죽자 슬피 울다가 방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었다가 가인(家人)에게 발각(發覺)되어 조모(祖母)가 구제(救濟)하였다. 그 後 집안어른을 정성으로 봉양(奉養)하고 나서 의리(義理)를 생각하여 목숨을 버리니 남편이 죽은 뒤 12年이 되었다. 〈읍선생(邑先生)〉 심석현(沈碩賢):癸亥11月初3日 래임(來任)하여 甲子8月에 사임하였다. 심 융(沈 瀜):丁丑7月初4日 도임(到任)하여 壬午正月29日 만기(滿期)로 사임(辭任)하였다. 심 공(沈 珙):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고 戊戌閏8月22日 도임(到任)하여 己亥四月에 대간(臺諫)의 장계(狀啓)로 사임(辭任)하였다. 심주관(沈周觀):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고 甲辰7月初6日 도임(到任)하여 乙巳6月12日에 별세(別世)하였다. 심능격(沈能格):丁酉9月 도임(到任)하여 戊戌12月 사임(辭任)하였다. 심능묵(沈能默):壬寅7月 도임(到任)하여 甲辰6月 사임하였다. 심욱지(沈勗之):甲申12月 도임(到任)하여 乙酉閏2月 辭任하였다. 〈관안(官案)〉 심 총(沈 棇):戊子 심수준(沈壽浚):乙未 심원택(沈元澤):庚戌 심정택(沈定澤):己丑 심완진(沈浣鎭) 심광세(沈光世) 〈무과(武科)〉 심 눌(沈 訥):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군수(郡守)였다. 심시현(沈時顯):무(武)를 겸(兼)하였다. 〈효열(孝烈)〉 심 두(沈 枓):청파부원군 전(靑坡府院君 銓)의 현손(玄孫)으로 처음 산동(山洞)에 살적에 그 조모 정씨(祖母 鄭氏)가 열행(烈行)으로 정려(旌閭)를 命받고 그 後에 명석(命錫)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늙도록 아픔을 머금고 추상(追喪)의 禮를 行하여 사당에서 제사(祭祀)지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일문(一門)에서 효열(孝烈)하는 것을 사람들이 칭송(稱頌)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