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지

〈읍재선생(邑宰先生)〉 군수(郡守)
심 즙(沈 楫):문과에 급제하여 통훈(通訓)이었고 정묘(丁卯) 7月 29日에 부임하여 무진(戊辰)에 의주 부윤(義州 府尹)으로 승진하여 갔다.
심 경(沈 鏡):문과에 급제하여 통훈(通訓)이었고 갑술(甲戌) 8月 21日에 부임하여 을해(乙亥)에 이배(移拜)되었다.
심유진(沈有鎭):문과에 급제하여 통정(通政)이었고 무술(戊戌) 8月 12日에 부임하였고 경모(庚午)에 퇴직하였다.
심능직(沈能稷):문과에 급제하여 통훈(通訓)이었고 임신(壬申) 正月 3日에 부임하여 동년에 어사(御使)가 글을 올려 파직되었다.
심건택(沈健澤):임인(壬寅)에 부임하였다.
〈무과(武科)〉
심능기(沈能驥):충신 우신(忠臣 友信)의 후손이요 여러 주군(州郡)의 수령(守令)을 거쳐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증직(贈職)〉
심의철(沈宜哲):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였다.
〈생원(生員), 진사(進士)〉
심천기(沈天祺):좌의정 덕부(左議政 德符)의 후손이요 진사(進士)였다.
심봉상(沈鳳相):안효공 온(安孝公 溫)의 후손이요 생원(生員)이었다.
심동미(沈東美):천기(天祺)의 질(姪)이며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였다.
심인순(沈仁淳):진사(進士)였다.
심제순(沈悌淳):안효공 온(安孝公 溫)의 후손이요 생원(生員)이었다.
심헌지(沈憲之):안효공 온(安孝公 溫)의 후손이요 생원(生員)이며 정유지(丁酉誌)에 실려있다.
〈음사(蔭仕)〉
심사숙(沈思淑):증참판 우신(贈參判 友信)의 증손(曾孫)이요 감역(監役)이었다.
심사윤(沈思潤):증참판 우신(贈參判 友信)의 증손(曾孫)이요 부호군(副護軍)이었다.
심사명(沈思溟):부호군 사윤(副護軍 思潤)의 제(弟)요 효자였고 교官(敎官)이었다.
심세영(沈世英):교관 계(敎官 誡)의 자(子)요 통덕랑(通德郞)이었다.
심세웅(沈世雄):통덕랑 세영(通德郞 世英)의 제(弟)요 동정(同正)이었다.
심의경(沈宜京):가선 의봉(嘉善 宜鳳)의 제(弟)요 도정(都正)이었다.
심은택(沈殷澤):호는 송암(松菴)이며 가선 의봉(嘉善 宜鳳)의 자(子)요 참봉(參奉)이었다.
심현택(沈賢澤):참봉 은택(參奉 殷澤)의 제(弟)요 의관(議官)이었다.
심 극(沈 ):참의(參議)였다.
심 계(沈  誡):교관(敎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심봉양(沈鳳陽):봉상사정(奉常寺正)이었다.
심인순(沈仁淳):군수(郡守)였다.
심능봉(沈能奉):감찰(監察)이었다.
심의태(沈宜泰):도사(都事)였다.
심의훤(沈宜楦):감찰(監察)이었다.
심일택(沈壹澤):참봉(參奉)이었다.
심의석(沈宜錫):참봉(參奉)이었다.
〈수직(壽職)〉
심의수(沈宜洙) 심능규(沈能珪) 심능연(沈能璉)
심의성(沈宜聖):兵曹參判(兵曹參判) 심우신(沈友信)의 후손이요 통정의관(通政議官)이었다.
심의봉(沈宜鳳):병조참판(兵曹參判) 심우신(沈友信)의 후손이요 통정(通政)에서 가선에 올랐다.
〈이조충신(李朝忠臣)〉
심우신(沈友信):자(字)는 공택(公擇)이요 안효공 온(安孝公 溫)의 후손이다. 기개(氣槪)가 있었고 옹진현령에 임명되었다. 임진년(壬辰年)에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을 적에 金정승 命元이 임금에게 公을 임진왜란에 참전할 것을 아뢰니 公이 드디어 의병을 일으켜 수천(數千) 군중을 모아 표의(彪義)로 기(旗)이름을 삼고 황간(黃澗)에 이르러 적을 만나 격파하고 진주에서 패하자 촉석루에 올라가 창의사(倡義使)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서로 맹세하기를 죽어서 사나운 귀신이 되어 적을 죽일 것이다 하고 술잔을 던지고 일어나서 북쪽을 향하여 네번 절하고 물에 뛰어 죽으니 정승 명원(命元)이 公의 충성을 아뢰어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장천사(長川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흠충비(欽忠碑)를 세웠고 이상공 단하(李相公 端夏)가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박손재 광일(朴遜齋 光一)의 제문(祭文)이 있다. 아들 후(詡)와 계(誡)가 전쟁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척왜소(斥倭疏)를 올렸다.
〈사우(祠宇)〉
장천사(長川祠):군(郡)의 동쪽 외서(外西)에 있고 거리는 삼십리(30里)요 충렬(忠烈) 침우신(沈友信) 청백리(淸白吏) 리제형(李齊衡) 충효 리단석(忠孝 李端錫)을 배향(配享)하였고 숙종조(肅宗朝)에 창립하였다.
〈효자(孝子)〉
심능호(沈能浩):자(字)는 연직(然直)이요 충신 우신(忠臣 友信)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뜻을 잘 받들고 어기지 않으며 어머니가 즐기는 것을 반드시 드리고 상을 당하여서는 수장(水漿:음료)을 마시지 않고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조상을 정성으로 받들었다.
심의봉(沈宜鳳):병조참판 우신(友信)의 후손이요 부모를 섬김에 나무하여 팔아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드렸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삼년을 슬프게 곡하고 소복을 입고 지냈으며 기제사(忌祭祀)에도 반듯이 3日간을 재계하고 제수를 차려 올렸다.
심관지(沈寬之):부모의 병환에 혈지회소(血指回甦)하고 작지연수(斫指延壽) 하였고 전후상(前後喪)에 예를 준수하여 여러 번 향도천(鄕道薦)에 올랐다.
심능광(沈能光):효행(孝行)이 출천(出天)하여 여러 번 포계(褒啓)를 받았다.
심능문(沈能文):친환(親患)에 상분(嘗糞)하고 비구(飛鳩)가 입정(入庭)에 탕을 끓여 들였다.
심능섭(沈能涉):사친(事親)에 지체(志體)에 맞게하고 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준수하여 여러 번 鄕道薦에 올랐다.
심능광(沈能光):효행이 탁이(卓異)하여 예조(禮曹)의 완문이 있다.
심능형(沈能衡):효우(孝友)를 겸하였으나 부모 봉양 할 길이 없었고 친환에 백약이 무효하더니 갑자기 도인을 만나 자금산(紫金散) 한 봉지를 받아 효험을 보았고 향천(鄕薦)에 올라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열녀(烈女)〉
심 씨(沈 氏):관향은 청송이요 도사 함평 이돈백(都事 咸平 李敦伯)의 처이다. 시부모를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고 시아버지가 卒하자 슬퍼하였고 상장(喪葬)에 예를 다하였다. 시어머니 나이 70에 이질에 걸리니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상을 당하여서는 몸이 야위도록 슬퍼하였다.
심 씨(沈 氏):교관 강화 봉진국(敎官 江華 奉鎭國)의 처요 관향은 청송이며 남편이 병들자 허벅다리를 베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에 넣어드리고 임종에 남편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아들 때문에 그만두었고 은사금(恩賜金)을 받지 않고 죽으니 전간재(田艮齋)가 찬하고 오후석(吳後石)이 갈명(碣銘)을 지었다.
심 씨(沈 氏):금성 나종문(錦城 羅鍾文)의 처요 관향은 청송이다. 남편의 병 7年동안에 백방으로 구호(救護)하다가 남편이 죽자 7日동안을 먹지 않더니 어린아이를 생각하여 종신토록 절개를 온전히 지켰다.
심 씨(沈 氏):고흥 유제현(高興 柳濟賢)의 처요 관향은 청송이다. 남편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었으나 喪을 당하자 어린 아이에게 마음을 돌려 남은 생명을 참고 보전하였으며 슬퍼함이 도에 넘었고 길삼을 하여 치산(治産)하니 향천(鄕薦)에 올랐다.
심 씨(沈 氏):전주 이문의(全州 李文宜)의 처요 관향은 청송이며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들이 없었으나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에 예를 다하고 조상을 정성을 다하여 받들고 양자를 하여 가문을 부지하였다.
심 씨(沈 氏):전의 이진환(全義 李鎭煥)의 처요 관향은 청송이다. 성품과 행실이 정숙(貞淑)하였더니 남편의 상을 당하여 조석으로 궤연(几筵)에 상식(上食)을 올리고 아침저녁으로 墓앞에서 곡하며 삼년상(三年喪)에 슬픔을 다 하였고 두 아이를 義로써 가르쳤으며 찬양문(讚揚文)이 있다.
심 씨(沈 氏):광주 이몽술(廣州 李夢述)의 처요 관향은 청송이다. 시부모에게 효도(孝道)하였고 병들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렸고 남편의 병에 하늘에 낫게 해 달라고 빌며 허벅다리를 찔러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상을 당하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말라 뼈만 남으니 천장(薦狀)이 있었다.
〈총묘(塚墓)〉
충 열(忠 烈):청송 심우신 예장(靑松 沈友信 禮葬)의 묘(墓)는 삼서봉서동(森西鳳棲洞)에 있고 진좌(辰坐)요 재각(齋閣)과 석물(石物)과 산판(山坂)이 있다.
(가) 영광군(靈光郡)
〈선생안(先生案)〉 군수(郡守)
심 박(沈 樸):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정(通政)이었고 갑자팔월(甲子8月)에 도임(到任)하여 을축칠월(乙丑七月)에 모상(母喪)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심 방(沈 枋):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훈(通訓)이었다. 壬申 5月에 도임(到任)하였고 계유육월(癸酉六月)에 동지사 서장관(冬至使 書狀官)에 제수되었다.
심우량(沈遇良):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계사(癸巳) 8月 19日 도임(到任)하여 동년(同年) 12月 사임하였다.
심 석(沈 錫):무과(武科)에 급제하여 戊申11月에 도임하였고 동년에 대정현감(大靜縣監)으로 이배(移拜)되었다.
심동규(沈東圭):문과(文科)에 급제하여 戊戌 5月 17日 임명되었고 辛丑 5月17日 정언(正言)으로써 부름을 받았다.
〈문과(文科)〉
심희무(沈希武):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찰방(察訪)이었다.
심안평(沈安枰):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이었다.
심지선(沈之渲)‥문과에 급제하여 판교(判校)였다.
〈무과(武科)〉
심동석(沈東碩):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과의교위(果毅校尉)였다.
심장원(沈章源)‥무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였다.
심중진(沈重鎭):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였다.
〈음사(蔭仕)〉
심윤환(沈潤煥):도정(都正)이었다.
심기상(沈基相):도정(都正)이었다.
심의종(沈宜宗):통정(通政)이었다.
심의영(沈宜榮):도정(都正)이었다.
심의홍(沈宜烘):감찰(監察)이었다.
심훈택(沈勳澤):도정(都正)이었다.
심영택(沈永澤):참봉(參奉)에서 통정(通政)에 승진되었다.
심면택(沈冕澤):동몽교관(童蒙敎官)이었다.
심일상(沈一相):가선(嘉善0이었다.
〈가자(加資)〉
심형규(沈亨奎):통정(通政)에 가자(加資)되엇다.
심두상(沈斗相):부호군(副護軍)에 가자(加資)되었다.
심의현(沈宜鉉):통정(通政)에 가자(加資)되었다.
심의균(沈宜均):가선(嘉善)에 가자(加資)되었다.
〈증직(贈職)〉
심의준(沈宜俊):효행으로써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심능오(沈能五):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심의영(沈宜榮):가선(嘉善)에 증직되었다.
심영상(沈榮相):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심열상(沈悅相):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심능천(沈能千):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사마(司馬)〉
심봉서(沈鳳瑞):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문행(文行)〉
심훈택(沈勳澤):행실이 두터웠고 효도하고 우애(友愛)하였으며 학문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임번(林樊)에서 지조를 굳게 지켰고 창수록(唱酬錄)이 있다.
〈유림(儒林)〉
심관택(沈琯澤) 심용섭(沈瑢燮) 심기보(沈棋寶) 심기원(沈棋源)
〈행의(行誼)〉
심원규(沈元奎):의지와 절개가 굳고 확실하며 재주와 국량이 월등하게 뛰어나 일찍 벼슬공부를 하지 않고 만년에 성리학(性理學)을 독실히 연구하여 세상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원우(院宇)〉
산정사(山亭祠):군북이십리(郡北20里)에 있고 수찬 심규암 안평(修撰 沈葵菴 安枰)과 판교 심송계 지선(判校 沈松溪 之渲)을 배향(配享)하였다.
〈제영(題詠)〉
시양정사(時揚精舍):군북이십리(郡北20里) 신광면(新光面) 응봉대산(鷹峯大山) 아래에 있으니 인재 심의준(忍齋 沈宜俊)이 머물었던 곳이다.
〈일덕(逸德)〉
심세웅(沈世雄):사정(司正)으로 병자호란에 여러 번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고 인하여 두문 자정(杜門 自靖)하니 세상에서 처사(處士)라 일컬었다.
심윤지(沈潤之):학행(學行)으로 세상에 알려지니 그때 도백(道伯)인 조인영(趙寅永)이 찬하여 말하기를 날마다 경서 문장(經書 文章)을 주로 궁구(窮究)하고 여사(餘事)는 단포루항(簞匏陋巷)에 顔子의 즐기는 것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충의(忠義)〉
심안평(沈安枰):홍문관(弘文館) 수찬으로써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가니 帝가 그 충절이 가상하다 말하고 호를 규암(葵菴)이라 내렸고 돌아오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차례를 뛰어넘어 가자(加資)하니 물러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록훈(錄勳0이 있다.
〈효행(孝行)〉
심유대(沈有大):부모를 봉양하는데 늘 주육(酒肉)을 드렸고 상을 당하여는 시묘살이를 3年동안 하니 향리(鄕里)가 칭찬하고 천거(薦擧)하였다.
심일상(沈一相):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위 부모의 뜻에 순종(順從)하였고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하는데 호랑이가 호위(護衛)하는 기이한 일이 있었고 가선(嘉善)에 추증되었다.
심인상(沈仁相):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고 상을 당하여는 형과 함께 시묘살이 하니 통정에 추증되었다.
심의준(沈宜俊):그 효성(孝誠)은 천성(天性)으로 타고났고 문장은 여사(餘事)였으며 상을 당하여 6年동안 시묘살이하였고 7旬의 나이에도 어린애가 부모를 그리워하듯 깊이 사모하니 도백과 암행어사가 추천하여 표창을 받았고 교관(敎官)에 추증되었다.
〈효부(孝婦)〉
심 씨(沈 氏):장춘택(張春澤)의 처(妻)로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고 따뜻하고 시원한 것을 알맞게 해드리고 甘旨를 떨어뜨리지 않고 여러 해 동안 병석에서 곁을 떠나지 않고 시탕(侍湯)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였다.
심 씨(沈 氏):김재수(金在琇)의 처로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공경으로 섬겼으며 시어머니가 병들자 분예(糞穢)를 청소하고 일어나고 앉는데 부축하고 음식을 대신 숟가락으로 먹여드리고 상을 당하여는 슬픔을 다하였다.
심 씨(沈 氏):이충실(李忠實)의 처로 남편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하종(下從)하니 예조(禮曹)에 추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