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기지(청송도호부, 부사) |
현비암(賢妃巖)〉:남천(南川)위 보광산(普光山)아래 찬경루(讚慶樓)앞에 있다. 옛날에 바위모양이 험악하였더니 文林郞 심홍부(문림랑 沈洪孚)를 장사지내던 前날저녁에 갑자기 벼락이 쳐서 험석(險石)이 잘게 부서져 그 속에서 죽순(竹筍)이 나오니 지가(地家)에서 왕비(王妃)가 나올 경사스러운 징조라 하였으며 소헌왕후(昭憲王后)가 탄생(誕生)한 뒤에 이름을 삼았다.
<명소(名所)〉 월명대(月明臺):군 북오리(郡 北五里) 방광산하(放光山下)에 있고 일명(一名)은 도화동(桃花洞)이다. <총묘(塚墓)〉 심홍부 묘(沈洪孚 墓):부(府)의 南쪽5里 보광산신좌(普光山辛坐)에 있다. 심 손 묘(沈 遜 墓):부(府)의 東쪽 거대곡장등 묘좌(巨大谷長嶝 卯坐)에 있다. 심 정 묘(沈 汀 墓):부남면(府南面) 나곡(羅谷) 해좌(亥坐)에 있다. 심학령 묘(沈鶴齡 墓):부(府)의 北쪽五里 도치동(道致洞) 간좌(艮坐)에 있다. 심 청 묘(沈 淸 墓):부(府)의 北쪽五里 도치동(道致洞) 간좌(艮坐)에 있다. 심 순 묘(沈 淳 墓):府南面(府南面) 라곡방(羅谷傍)에 있다. <문묘(文廟)〉 청송문묘(靑松文廟):부(府)의 동일리(東一里)에 있다. 처음에는 府의 北쪽五里쯤 되는 굴동(窟洞)에 지었는데 지세(地勢)가 너무 높고 험(險)하여 만력갑진(萬曆甲辰)에 부사이영도(府使李詠道)가 부(府)의 동일리(東一里) 국동(菊洞)에 이건(移建)하였고 다시 지리(地理)가 좋지 아니하여 강희갑술(康熙甲戌)에 부사이문징(府使李文徵)이 부(府)의 東쪽 불후(不帿)의 땅에 이건(移建)하였으며 고종신미(高宗辛未)에 부사윤현기(府使尹顯岐)가 중수(重修)하였고 상량문(上樑文)이 있다. <루정(樓亭)〉 찬경루(讚慶樓):군(郡)의 성내남천(城內南川)위에 있고 청기군(靑己君) 심홍부(沈洪孚)의 제각(祭閣)으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팔대군(8大君)이 하담(河澹)에게 命하여 창건하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 송백강릉(松柏岡陵)이라 편액(扁額)을 썼다. 덕은당(德隱堂):부(府)의 西쪽 오리(五里)쯤되는 덕천(德川)에 있으니 심풍주(沈豊周)가 살던 곳이다. 〈사찰(寺刹)〉 보광사(普光寺):남오리(南5里)에 있다. 〈인물(人物)〉 심 손(沈 遜):世宗朝에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서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월명대(月明臺)에 돌아와 의분(義憤)이 복바쳐 슬퍼하고 한탄하며 一生을 마쳤다. 심학령(沈鶴齡):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문인(門人)으로 일찍 사문(師門)에 들어가 박학문도(博學聞道)하여 명종조(明宗朝)에 독행(篤行)으로써 종부사주부(宗簿寺主簿)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도동(道洞)에 정사(精舍)을 짓고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유행(儒行)〉 심응렴(沈應濂):충의 청(忠義 淸)의 아들로 경서(經書)의 뜻을 힘써 연구(硏究)하고 후학(後學)을 교도(敎導)하여 인조조(仁祖朝)에 옥과훈도(玉果訓導)가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친명(親命)으로 집에서 할머니를 잘 섬기니 향당(鄕黨)이 효(孝)로써 칭송(稱頌)하였다. 심성지(沈誠之):희대(希大)의 현손(玄孫)으로 둔와 류양흠(遯窩 柳養欽)을 좇아 배우고 고종조(高宗朝)에 금부도사(禁府都事)에서 도정(都正)에 승진(陞進)하였고 경서(經書)를 즐겨 읽고 몸가짐이 근실(勤實)하였으며 병신년(丙申年)에 창의(倡義)하였다. 〈문행(文行)〉 심응지(沈應之):손(遜)의 후손(後孫)으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門人)이며 온공(溫恭)한 행실(行實)은 천성(天性)에서 나왔고 정심(精深)한 학문(學問)으로 사문(師門)에서 칭찬 받았으며 상예요의(喪禮要義)를 편찬(編纂)하였다. 심의준(沈宜濬):능정(能鼎)의 子로 자성(姿性)이 순수하고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으며 문학(文學)이 넉넉하며 몸가짐이 정대(正大)하여 사우(士友)의 추중(推重)을 받았고 저술(著述)한 론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의 석의(釋義)와 교중기사(校中記事0가 있다. 〈훈신(勳臣)〉 심홍부(沈洪孚):고려충렬왕조(高麗忠烈王朝)에 문림랑위위사승(文林郞衛尉寺丞)이었고 청기군(靑己君)에 봉(封)해졌으며 대대(代代)로 청송부(靑松府)에 살아 자손(子孫)이 인(因)하여 관향(貫鄕)을 삼았고 주방산(周房山)에 남은 자취가 있으니 후손성희(後孫聖希)가 묘산기사(墓山記事)에 말하기를 백천(百千)의 지파(支派)가 대대(代代)로 번창(繁昌)하고 세분의 왕후(王后)가 나왔으며 대대(代代)로 경상(卿相)이 있어 국가(國家)와 기쁜 일과 슬픈 일을 같이하여 울연(蔚然)히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 되었으니 아무튼 우리 조상(祖上)의 적선(積善)함이 영원(永遠)히 후손(後孫)에게 傳해지지 않았으면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으리오 하였다. 심 용(沈 龍):연(淵)의 子로 고려공민왕조(高麗恭愍王朝)에 덕행문장(德行文章0으로써 전리정랑(典理正郞)이 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그만두고 돌아와서 여러 번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이상국규보(李相國奎報)와 좋은 벗으로 지내어 창수록(唱酬錄)이 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니 아들 정안공 덕부(定安公 德符)가 貴해졌기 때문이다. 공(公)의 신주(神主)를 친진후(親盡後)에 묻으려 하니 인순왕후(仁順王后)가 하루는 청릉부원군 강(靑陵府院君 鋼)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꿈에 우리 할아버지가 나타나시어 길이 제사지내주기를 원(願)하니 신주함(神主函)을 묻지 말고 받들고 돌아와서 그 자손(子孫)들에게 벼슬을 주고 제사지내도록 하라 하였으니 그 사실(事實)이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실려있다. 심덕부(沈德符):청화부원군 룡(靑華府院君 龍)의 子로 고려충혜왕조(高麗忠惠王朝)에 문음(門蔭)으로 강화부윤(江華府尹)이 되었고 선유(先儒)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울연(蔚然)히 文翁(漢나라 舒의 사람 젊어서부터 호학(好學)하여 천하(天下)의 군국(郡國)에 학교(學校)를 세웠음)의 교화(敎化)가 있었다. 우왕경신년(禑王庚申年)에 왜구(倭寇)가 대거침공(大擧侵攻)함에 능히 막지 못하거늘 公이 가서 일거(一擧)에 모두 섬멸(殲滅)하니 공양왕원년(恭讓王元年)에 중흥구공신(中興九功臣)에 참록(參錄)되고 충근량절익찬좌명공신(忠勤亮節翊贊佐命功臣)의 號를 받고 벽상삼중대광문하시중(壁上三重大匡門下侍中)에 임명(任命)되었으며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봉(封)해졌다. 무진년(戊辰年)에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써 태조(太祖)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는 일을 도와 임신년(壬申年)에 회군공(回軍功)에 록선(錄選)되었는데 公의 功이 제일위(第1位)였으나 작훈(爵勳)을 받지 않고 사양(辭讓)하니 이에 청성백(靑城伯)에 봉(封)해졌다. 갑술년(甲戌年)에 송도(松都)에 성을 쌓았고 또 한양(漢陽)에 새 도읍(都邑)을 만드는데 公이 모두 도맡아 이루었다. 정종원년(定宗元年)에 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정승(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에 특진(特進)되었다. 심 온(沈 溫):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子로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탄생(誕生)하였고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었다. 심 종(沈 淙):태조대왕(太祖大王) 녀(女) 경선공주(慶善公主)의 남편이요 청원군(靑原君)에 봉(封)해졌다. 심 회(沈 澮):온(溫)의 子로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이었고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요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심순문(沈順門):회(澮)의 손(孫0으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은 사인(舍人)이었고 연산조갑자년(燕山朝甲子年)에 화(禍)를 당하였고 명종조(明宗朝)에 도승지(都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심연원(沈連源):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되었고 영의정(領議政)이었고 시호(諡號)는 충혜(忠惠)이다. 심 강(沈 鋼):연원(連源)의 子로 인순왕후(仁順王后)를 탄생(誕生)하였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심 호(沈 浩):단의왕후(端懿王后)를 탄생(誕生)하였고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에 封해졌다. 〈충의(忠義)〉 심 연(沈 淵):홍부(洪孚)의 子로 고려조(高麗朝)의 합문지후(閤門祗侯)였고 만년(晩年)에 산청(山淸)에 나가 석답촌(石沓村)에 살며 명리(名利)에서 벗어나 일생(一生)을 림천(林川)에서 살았다. 심원부(沈元符):용(龍)의 子로 익재이제현(益齋李齊賢)에게 사사(師事)하였고 고려조전리판서(高麗朝典理判書)였고 고려(高麗)의 운(運)이 다하자 72賢으로 더불어 조선조(朝鮮朝)에 벼슬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과 경현사(景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심 청(沈 淸):학령(鶴齡)의 子로 宣祖壬午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였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박통(博通)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硏究)하고 한편으로 천문력수(天文曆數)를 연구(硏究)하였다. 일찍이 밤에 정자(亭子)위에 앉아 천상(天像)을 우러러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수년(數年)안에 나라에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하더니 과연(果然)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왜적(倭賊)을 격멸(擊滅)하였다. 심 호(沈 湖):효(孝)의 현손(玄孫)으로 벼슬은 사천현감(泗川縣監)이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적개(敵愾)한 공(功)이 있었고 난후(亂後)에 거민(居民)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을 사랑하니 한 고을이 힘입어 편안하였다. 심 정(沈 汀):효(孝)의 현손(玄孫)으로 얼굴이 잘나고 기개(氣槪)가 사람에게 뛰어나 나이 25歲 때 임진란(壬辰亂)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고 충주(忠州)에 가서 적(敵)과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여 의리장(衣履葬)으로 장사를 지냈다. 심종명(沈宗明):덕부(德符)의 후손(後孫)으로 선조조(宣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가 되어 호종(扈從)하므로 독전독운사(督戰督運使)가 되어 임진강(臨津江)을 지키다가 순절((殉節)하니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정조계묘(正祖癸卯)에 정려(旌閭)를 명(命)받았다. 심예달(沈禮達):정(汀)의 子로 벼슬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이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倡義)하였다. 〈열녀(烈女)〉 정 씨(鄭 氏):침달지(沈達之)의 처(妻)로 본디 부덕(婦德)이 있어 남편이 일찍이 학질로 연삼년(連三年)을 앓아 거의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허벅지살을 베어 시정(市井)의 고기를 사왔다고 속여 술과 같이 들여 남편의 병(病)이 치유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