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현읍지

 〈환적(宦蹟)〉 현감(縣監)
심능익(沈能益) 심약황(沈若黃) 심부(沈溥) 심항(沈沆)
심의진(沈毅鎭):乙亥에 부임(赴任)하여 丙子에 사임(辭任)하였다.
〈효자(孝子)〉
심안린(沈安麟):모병(母病)에 꿩고기와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사방으로 구하여 꿩과 잉어를 우연히 얻어 병(病)이 낳으니 사람들이 효성(孝誠)의 소치(所致)라 하였다.
공생(貢生 沈文守):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고 보상(執喪)에 례(禮)를 다하고 종신(終身)토록 고기를 먹지 않으며 조석(朝夕)으로 제사를 지내니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명(命)받았다.
심이문(沈以文):부병(父病)에 단지진혈(斷指進血)하여 7年의 수(壽)를 연장(延長)시키고 상(喪)을 당(當)하여는 슬피 울고 그 례(禮)를 다하였다.
심동익(沈東益):부병(父病)에 단지진혈(斷指進血)하여 3日의 命을 연장(延長)하니 사람들이 그 효성(孝誠)에 감복(感服)하였다.
심 혼(沈 渾):남명조식(南冥曺植)의 문인(門人)으로 효염(孝廉)하였고 단성현감(丹城縣監)이었다.
〈효녀(孝女)〉
심무정(沈武丁):나이 십여세(10餘歲)에 어머니가 물에 빠져 떠내려감에 몸을 물에 던져 구하려다가 기진맥진(氣盡脈盡)하여 죽으니 사실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命받았다.
표량신처심씨(表良臣妻沈氏):시어머니가 종기를 앓는데 한여름에 몸소 스스로 고름을 빨아 입에 가득하였으나 싫은 기색(氣色)이 없었고 하늘과 신(神)에게 백배(百拜)하며 빌었다. 병(病)은 위독(危篤)하고 집은 매우 가난하니 몸소 길삼 하였으나 시어머니 곁에서 근심하고 한탄하지 않았으며 혼수(婚需)해온 것을 팔고 그 머리를 깎아 팔아 단지(甘旨)를 공여(供與)하였다.
〈절부(節婦)〉
석 씨(石 氏):심치(沈致)의 처(妻)로 나이 20에 남편이 죽었거늘 시어머니를 효성(孝誠)으로 섬겼다. 그 아버지가 개가(改嫁) 시키고자하니 사양하며 말하기를 남편이 독자(獨子)로써 일찍 죽었으니 아버지가 만약 뜻을 빼앗으면 남편은 죽었는데 병든 어머니를 그 누가 봉양(奉養)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듣지 않고 시어머니를 더욱 부지런히 섬기고 칙간에 갈 때마다 스스로 업고 감으로 사실이 알려져 정려(旌閭)를 命받았다.
심 씨(沈 氏):전복용(田伏龍)의 처(妻)로 癸巳年에 왜적(倭賊)을 피(避)해 산에 들어가자 적(賊)이 겁탈코자 하거늘 듣지 않고 적(賊)에게 죽으므로 사실이 알려져 정려(旌閭)를 命받았다.
〈인물(人物)〉
심대승(沈大承):임지왜란(壬辰倭亂) 때 공로(功勞)로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심기일(沈紀一):곽재우(郭再佑)의 막하(幕下)에서 정진(鼎津)을 지키는데 군공(軍功)이 있어 벼슬이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심언청(沈彦淸):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주부(主簿)였고 곽재우(郭再佑)의 막(幕)을 도와 功이 있어 패(牌)를 하사(下賜)받았다.
심언명(沈彦明):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첨정(僉正)이었다.
심 량(沈 諒):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주부(主簿)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殉節)하였다.
심 눌(沈 訥):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판관(判官)이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殉節)하였다.
심대생(沈大生):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사과(司果)였다.
심대징(沈大澄):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이었다.
심계흥(沈繼興):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판관(判官)이었다.
심 혼(沈 渾):조식(曺植)의 문인(門人)으로 효염(孝廉)하여 벼슬이 현감(縣監)이었고 자호(自號)는 모정(慕亭)이다.
〈총묘(塚墓)〉
심문식(沈文湜):정동가현(正洞佳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