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비문행(燕飛聞杏: 제비가 날며 살구향기를 맡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마을에는 살구꽃이 봄 향기를 뿜어내고, 강남 갔던 제비는 지지배배 울며 처마 밑으로 날아드는 것이 우리 봄의 시작이었다. 이와 같이 살구꽃과 제비는 바로 봄의 전령사들이라 할 것이다. 이들이 현재의 화폭 위에서 조우(遭遇)하고 있다.

화면 아래에는 대숲과 큰 살구나무 둥치 일부가 보인다. 거의 화면 상단에서 가느다란 두 가지가 화면 위아래로 각각 벋어나갔다. 그리고 그림 한가운데는 막 하강하다 고개를 위로 쳐든 제비의 날쌘 모습이 순간적으로 포착되었다. 과감한 구도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현재의 구성 솜씨가 돋보인다.

살구꽃은 남빛으로 군데군데 피어 있고 빨간 꽃술이 아주 작은 점으로 점점이 박혀 있다. 남빛은 연분홍빛 연분(鉛粉)이 산화되어 변색한 것이다. 제비는 목덜미와 꼬리부분이 붉고, 배 부분은 살구꽃 빛깔이다. 두 날개와 꼬리는 진한 먹색으로 그려냈다. 제비의 시선을 따라 감상자의 눈도 살구꽃으로 이끌어 지는 구성의 묘미가 살아있는 그림이다. "현(玄)", "재(齋)"라는 타원형 주문인장을 찍었다. (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