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폭동(萬瀑洞)

만폭동은 내금강의 여러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곳으로 폭포 아니면 연못이고 연못 아니면 폭포라고 말할 정도로 금강산의 계곡미를 대표하는 절경이다.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토대로 자신의 산수화풍을 정립시켜 나갔던 현재 심사정이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소재인 금강산의 만폭동을 그렸다.

오인봉(五人峯)과 너럭바위를 중심으로 그 뒷편 그 좌우에는 향로봉과 좌선암봉을 두고 중향성(衆香城)을 원경으로 삼은 것은 실경(實景)에 충실한 배치로 겸재의 <만폭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부감법(俯瞰法)을 채택하지 않고 평원(平遠)의 시각으로 만폭동 주변의 경물들을 바짝 당겨 그려 놓아 겸재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부적인 필묵법도 강한 수직준(垂直皴)과 명징(明澄)한 선염(渲染) 위주로 만폭동의 풍광을 묘사한 겸재와는 달리, 현재는 굵고 진한 윤곽선으로 경물들의 형태를 잡고 다소 강한 선염(渲染)으로 질량감을 부여했다. 또한 금강산의 백색 암봉이 가지는 삼엄한 골기(骨氣)는 농묵(濃墨)으로 쓸어내려 묘사했는데, 바위의 괴체감(壞體感)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무겁고 침울한 느낌이 든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장엄한 내금강 암봉들과 만폭동 골짜기로 쏟아져 들어와 빠르게 흘러 돌아가는 계곡수의 넘치는 생동감을 화폭에 담아내는 데는 역시 겸재의 활달한 구도와 명쾌한 필치가 보다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재의 금강산도가 겸재와 이렇듯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남종화풍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화풍 양식의 특성에 기인한 바가 크겠지만, 금강산을 유람할 당시 현재가 처한 여건이 겸재와는 사뭇 달랐던 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이다. 국왕의 후원을 받는 고관대작의 신분으로 금강산을 찾은 겸재와, 역적의 후손으로 배척받는 곤궁한 처지로 만년에 어렵게 찾아온 현재의 눈에 비친 금강산은 그 감회가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