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잔도군(蜀棧圖卷)

"이 산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길은 어느 때 열렸는가.
과와(夸媧)의 손 빌리지 않았다면,
한 덩어리 뭉친 것을 누가 갈랐으랴.
하늘은 기 끝에 조금 보이는데,
산세는 칼날처럼 날카롭구나. (後略)
(此山從古有, 此道幾時開, 不借夸媧手, 誰分混沌肧, 天形旂尾擲, 岡勢劍鋩摧,)"
(李齊賢, 『益齋亂稿』 卷1, 「蜀道」)

관중(關中)에서 사천(泗川)으로 가는 길인 촉도(蜀道)의 험난함을 묘사한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시다.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일찍이"蜀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 보다 더 어렵다.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읊었었다. 이후부터 촉도의 험난함은 많은 문인묵객들에 의해 시와 그림으로 표현되고 또 인생의 험난함에 비유되어 왔다. 여기 보이는 그림이 바로 심사정이 돌아가기 한 해 전에 그린 생애 마지막이자 최고의 작품인 <촉잔도권(蜀棧圖卷)>이다.

이 그림은 가까운 일가 중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물로 가문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재종질(再從姪, 7촌 조카) 애려(愛廬) 심유진(沈有鎭, 1723-1787)의 청을 받고 필생의 역작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림의 끝에 있는 심유진의 아들 심래영(沈來永, 1759-1826)의 제발을 통해 그림이 그려지는 정황을 살펴보겠다.

"아아! 나의 선군 애려(愛廬: 심유진)선생은 성품이 본래 담박하여 그림과 산수를 사랑하셨다. 무자(1678)년 가을에 숙부 양성공(陽城公: 沈以鎭, 1723-1768)과 함께 현재공(玄齋公: 沈師正)께 나아가 촉(蜀)의 산천을 그려 주도록 청했었더니 그림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양성공이 홀연 세상을 버리셨다. 선군은 슬픔이 극심하여 그 그림을 영구 앞에 올리고 사실을 말하며 통곡하였다. 그림은 드디어 우리 집의 기이한 보배가 되었고 종장(宗長: 집안의 가장 웃어른)인 상서공(尙書公)은 항상 절대적인 보배라고 일컬었다.

무술년(1778)에 한 외가 어른이 3일만 빌려간다고 하더니 드디어 이를 잃어버렸다 하며 끝내 돌려주지 않자 선군은 항상 이를 한탄했었다. 대개 산수의 빼어남은 반드시 촉도(蜀道: 촉으로 가는 길)를 일컫고 그림의 신묘함은 현재보다 더 뛰어남이 없다 하거늘 붓을 가다듬고 정신을 모으기를 수십 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점찍고 채색하여 참모습을 옮겨와 12준법(皴法)을 능히 다 갖추어 놓았음에랴! 깊고 깨끗한 필력이 문득 어찌 조화(造化)의 빼앗아가는 바로 될 수 있겠는가!(後略)"

결국 이 그림은 혼신의 힘을 기울인 심사정의 절필(絶筆: 마지막 작품)로 그의 모든 화법이 총망라 된 일생일대의 역작인 것이다. 그림의 처음부터 등장하는 험준한 산들은 촉도의 관문을 의미하는데 앞으로 전개될 수많은 기암고봉(奇巖高峰)들의 시작에 불과하다. 가파른 절벽과 구름에 잠긴 골짜기를 돌아 어렵사리 길을 가고 있는 나그네는 그림의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 험준한 촉도를 가는 것이 곧 한 사람의 인생 역정과 같아서 그 힘겨움이 나그네만의 것이 아닌 듯하다.

워낙 길게 이어지는 그림이라서 심사정은 중간 중간에 각각의 요소로 풍경을 마무리 지으며 다음의 풍경과 구별 지어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화면 구성을 부드럽게 이어주고 있다. 숨막힐 듯 이어지던 험준한 산과 깊은 계곡물의 신비로운 조화는 어느새 드넓은 강물이 나타나 숨을 고르며 끝을 맺는다. 장대한 화면의 끝에는 "무자중추방사이당촉잔(戊子仲秋倣寫李唐蜀棧)"이라는 관서가 있다. 심사정이 62세 때인 1768년(英祖 44) 8월에 송대의 대화가인 이당(李唐)의 필법에 따라 그렸음을 말하는 내용이다.

이 역작은 간송(澗松) 전형필(全瑩弼)선생이 1936년 경에 당시 서울에서 수십 간 큰 기와집 한 채 값이 천원내외하던 시절에 5천원을 주고 구입했던 것이다. 구입 당시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있는 상태라 간송선생은 정밀한 복원을 위해 일본 경도(京都)에 그림을 보내 6천원을 들여 재생해 내었으니, 민족의 보배를 알아보는 이의 뜻과 정성이 담겨 더욱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吳)